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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Feb 01. 2024

억울함을 참고 사는 삶...

폭력을 상식처럼 여기는 현실 사회

     

    중2 때 기억나는 아픈 상처가 있다. 담임한테 얻어맞은 일이다. 얻어맞았다는 말보다 짓밟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선생님 분풀이에 일방적으로 폭행당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가 교실 정리를 잘못한 게 발단이었다. 잘못된 책걸상 정리를 선생님이 나에게 지목한 것에 불응해서 벌어진 일이다. 지시에 거절한 내게 화가 난 선생님은 시계를 풀고 안경을 벗어던지고 폭력을 휘둘렀다.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코와 입술이 터지고 피멍이 들도록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내가 겪은 가장 억울하고 아픈 상처가 아니었나 싶다.


   사회와 도덕을 가르치는 담임은 평소에도 엄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는 불량 학생이 아는 아니었다. 그 반대인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담임에게 괘씸죄는 따로 있었다고 생각한다. 분기마다 수업료를 제 때에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호명하여 독촉받고 내는 편이었다. 가정 형편이 원죄였던 셈이다. 빚 독촉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심정은 괴로웠다. 그토록 두들겨 맞아도 아픔을 견딜만한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이 가난하게 살던 아이들에겐 그 정도 창피나 수모는 정도는 예사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는 일은 흔히 겪을 수 있다. 유교적 위계질서나 상명하복의 군사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 지내던 시절에는 흔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폭력이 만연한 한국 사회였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폭력이 예사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내 선배의 집단구타가 전통의식처럼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민주화 사회 후 폭력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법이나 제도보다 눈앞의 폭력이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은 현실이다. 잘잘못에 대한 시비를 가리기 전에 폭행과 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이후 국가 폭력 시대를 다시 맞고 있다. 검찰력으로 장악한 현재의 검찰 독재 정권이 그렇다. 9 차례나 국회가 제정한 법을 거부하는가 하면, 시행령으로 기존의 헌법이 정한 기존 질서조차 묵살하는 정권이다. 민생이나 안보 불안 책임은 외면한 채, 자신의 권력을 비판하거나 견제하는 정치인을 탄압하고 제거하는데만 몰두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 공정과 상식의 가치로 선택받은 권력이 국민과 국가의 안위와 미래마저 우려하게 만든 암울한 현실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검찰 독재 정권에 침묵하는 모습이다. 등 돌린 민심을 살펴야 할 집권 세력이나 견제 세력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폭압적 검찰 폭력이 두려워 납작 엎드려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정권 초반 부정 여론이 극에 달해도 침묵하는 모습이 어처구니없어 답답하게 느껴진다. 기성 언론 기득권 세력은 그렇다 치자. 각자도생의 삶을 강요당한 무기력한 청년세대나 국가 폭력에 익숙한 올드세대의 침묵은 이해한다. 하지만 검찰의 국가 폭력에 민주 시민의 희망마저 꺼지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교수로 재직하다 재단의 횡포에 맞서 싸운 적이 있다. 이사장 비위에 거슬려 표적 조사를 당해 해직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생존과 교권을 위해 2년 6개월을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마녀사냥으로 시작된 싸움은 불리하고 억울했지만 비정하고 만신창이 싸움은 피할 수가 없었다. 생존과 교권을 위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처절하고 억울했던 호소가 끝내 밝혀졌다. 부당한 해직이 원인 무효라는 대법원의 최종 평결로 끝은 났다. 생존권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재판에서 나를 향한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는다.


   연구실로 복귀했지만 교권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악마화로 낙인찍혀 공격당한 상처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가까웠던 동료조차 냉소적인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 부당한 갑질 횡포에 맞서 싸워 이긴 용기에 손뼉은커녕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무기력하고 허탈한 내 모습을 스스로 달래며 연구실을 떠나올 때 심정이 그랬다. 사모펀드 의혹으로 불거진 조국 장관이 표창장 위조와 자녀 특혜로 교수직을 잃고 가족마저 인격 살인당한 처지와 심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마녀로 지목되면 살아나기 어렵다. 이웃이나 동료조차 굶주린 사냥꾼으로 달려들어 돌을 던지기 때문이다. 폭력에 무기력한 시민은 공격자 편에 서야 생존에 유리한 것처럼 착각한다. 국민 세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자를 도와 부자를 위해 싸우는 꼴이다.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정치에 혐오감을 느낄수록 여론몰이에 쉽게 휩싸여 현혹될 가능성은 높다. 기득권 언론에 피의사실을 공포하여 검찰 독재가 가능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폭력으로 물들어 억울해도 참고 살아야 하는 까닭이 아닐까 한다.


    인격 살인으로 처참히 짓밟히고 좌절당해도 피의사실공포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지지와 성원을 보낸 시민도 많다. 수년 동안 마녀사냥으로 표적 수사를 받으며 테러 습격으로 생명을 잃을 뻔한 야당 대표가 살아날 수 있는 원인이다. 뚜렷한 증거 하나 없이 탄압받는 그에 공감하여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늘고 있다. 억울함을 참고 사는 삶에서 탈출할 희망이 있는 까닭이다. 폭력을 상식처럼 여기는 무기력한 사회에서 벗어나는 힘이고 위안이다. 검찰 독재에서 벗어나는 그날까지. 아자! 아자!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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