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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Mar 24. 2024

아들의 첫 월급

당당하게 가르치는 멋진 교사가 되길 바라며...

    오늘은 아들의 첫 월급날이다. 첫 월급에 설렌 아들이 며칠 전부터 월급 타령이다. 부모한테 의지하던 삶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그렇게 신이 난 모양이다. 월급을 타면 어디에 쓸지 기대와 고민에 부풀어 있다. '아빠는 내 나이에 살림살이를 책임졌다'라고 한탄하던 녀석이다. 부모에게 손을 내밀어 돈을 타는 것이 눈치 보이고 염증을 느꼈던 것이다. 앞으로 그런 그늘에서 탈출할 기회가 생겼으니 속으로 쾌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아들의 표정이 매우 밝아 보인다. 어깨와 목소리에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엄마도 덩달아 신바람이다. 상냥해진 말투에 흥이 나 있음을 짐작케 한다. 아들 바라기 엄마들의 공통점이 아닌가 싶다. 사실 집안 분위기가 한동안 싸늘했다. 시험에 실패한 아들 때문이다. 자책하는 아들로 인해 냉기가 돌아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가족 모두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러다 월급날을 맞아 아들이 태도가 변했으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모두가 반가워하고 즐거워했다. 아내의 얼굴에도 모처럼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다.

  

    즐거움은 저녁까지 계속됐다. 가족 축하 파티가 열렸다. 퇴근하던 아들이 고기 전문점에 들려 안심과 등심을 사들고 왔다. 자기 명의로 된 카드로 비싼 한우를 사 오는 날이 있다니! 아들 손으로 구워 낸 부드러운 고기 맛이 꿀맛 같았다. 푸짐한 식사를 마치자 아들은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힘들 때 용돈을 주고 격려를 해준 누나와 매형에 대한 보답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딸이 감동한 표정이다. 감격의 눈물을 참지 못하고 왈칵 쏟아냈다. 훈훈하고 흡족한 파티였다.


    월급의 절반은 이미 엄마 통장으로 보냈다 한다. 첫 월급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가족들에게 확실히 드러낸 셈이다. 예외가 있다면 나였다. '네가 사 준 맛있는 고기를 먹은 것으로 만족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러자 아들로부터 '다음 달 월급을 타면 더 맛있는 걸 사 줄게'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빠도 현금을 좋아한다)는 말을  솔직히 털어놓을 걸 그랬나. ('백수가 돈이 더 요긴한 걸 너도 잘 알고 있잖니!')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 게 후회되기도 했다.


    아들도 날 닮아 남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짐이 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아들 버킷 리스트에서 빠진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철석같이 믿던 녀석에게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기분이 오래간 이유가 아닐까. 무심한 녀석이 아니라는 믿음에 서운함도 큰 것이다. 나이 들어 벌써부터 세상에서 잊혀가는 무기력한 신세가 되다니! 외면당해 왕따가 된 기분이 씁쓸하고 묘했다. 사랑하고 의지하던 누군가에게 소외되고 배신당하는 것처럼 불안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불안이나 고통의 원인이 욕망이다. 불필요한 걸 원하기 때문에 병을 얻는다. 지성과 자아로 씻어내고 비워내면 떳떳하게 잘 살 수 있어도 그걸 잘 못하는 게 인간이다. 더러운 욕망으로 오염되어 불행에 빠지기도 한다. 욕망 덩어리에 빠져 허둥대는 이들이 많은 까닭이다. 방황하거나 망가지고 포기하는 사람 모두가 욕망 때문이다. 욕망 덩어리가 인생을 흥망으로 갈라놓는 셈이다. 사랑받고 인정받는 삶이 그토록 소중한지 깨닫게 한다. 누구든 함부로 무시하거나 부정하면 안 되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어릴 적부터 예의 바르고 겸손한 아들이다. 엄격하게 키우려 안 했어도 순둥이로 자랐다. 그런 아이일수록 심한 성장통을 겪기 마련이다. 절망과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아들이 그랬다. 자아 정체성을 잃은 고아처럼 번 아웃에 시달리는 최근 아들이 그랬다. 억압과 강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몹시 안쓰러웠다. 스스로 벗어나려 애쓰고 상담도 받고 해서 평온을 찾아가니 천만다행이었다. 삶의 주인공인 누구나 마찬가지다.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작은 충격에도 깊은 상처를 입는 여린 존재에 불과하다.


    아들이 3학년 담임을 맡았다. 22명 천덕꾸러기 담임교사가 얼마나 정신이 사납겠는가. 초임 교사는 아마 하루하루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툭하면 아프다고 떼를 쓰고, 주목을 받고 싶어 안달하는 아이, 모둠 생활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별난 아이도 있다.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알거나 선민의식을 가진 꼴불견 학부모까지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이다. 짜증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철부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좌충우돌할 아들의 심경이 얼마나 복잡할까.


    온실에서 수분만 먹고 자라는 요즘 아이들이다. 사교육에 내몰려 사고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측은한 아이들이다. 교사의 역할이 더 힘들고 까다로운 이유다. 그렇다고 학교 교육이 우열만 부추기면 안 된다. 서열을 매기는 수단에 불과한 교육은 미래가 없고 신뢰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이 차별이 아닌 평등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이유이다. 어떤 아이도 존엄한 가치를 지닌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가르치는 교사가 진정한 교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첫 월급날을 맞은 아들이 그런 교사의 꿈을 펼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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