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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Sep 18. 2024

수면과 친하면 좋은 이유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며

     무더위로 지친 여름이다. 이번처럼 무더위가 길었던 적이 없다. 두 달 넘게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된 기억은 태어나 처음이다. 요즘은 헬스장도 그만두고 산책마저 포기했다. 만사가 귀찮아 아무것도 하기 싫을 지경에 이르렀다. 더위를 피해 카페를 전전하는 게 고작이니 입 맛도 잃었다. 밥 맛이 아닌 생존을 위해 끼니를 먹는 셈이다. 추석인데 아직도 낮에는 불볕더위로 허덕이고 밤에는 열대야와 싸워야 한다. 지치고 지친 몸이 이제 한계에 이른 것 같다. 가을바람이 무서운 여름을 빨리 데려갔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저녁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졸음이 쏟아진다. 소파에 앉아 조는 날이 많아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침대에 누우면 잠이 막상 달아나 버리니 말이다. 잠을 청하기 어려운 것이 문제다. 거의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며 휴대전화에 매달리는 이유다. 밤마다 뒤척이며 북튜브를 듣는 게 일이다. 서너 시간 비몽사몽 하다 아침을 맞는 날이 허다하다. 전화기가 늘 머리맡에 있으니 자는 둥 마는 둥이다. 몸이 편할 리 없다. 가뜩이나 무거운 몸에서 '어~이 쿠' 소리가 난다. 노화와 불면이 만들어낸 경고음이다. 


    곤히 잠을 잘 땐 나지 않던 소리다. 낮의 피로가 밤이면 풀리기 때문이다. 열대야로 잠자리가 부실해지자  천근만근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 소리가 갈수록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심지어 정신이 멍하고 어지럼증이 느껴질 때도 있다. 수면 부족 원인을 제공한 날씨를 탓하며 짜증을 부리는 까닭이다. 잘 쉬고 잘 자는 것만큼 소중한 게 없다. 하루만 못 자도 정신이 혼미하고 그 이상 못 자면 생존이 위태롭다. 하루의 1/3이나 쉬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잠을 챙겨 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며칠이고 잠만 잤던 기억이 있다. 군생활이 힘든 원인도 수면에 있다. 규칙적인 생활에서 보초 근무를 제외하면 잠자는 시간이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군인만이 아니라 경찰이나 소방, 철도, 교정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는 일을 하는 이들의 공통점이다. 출퇴근이나 주말이 없는 살아야 한다.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수면의 제약으로 고통을 견뎌야 한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시절. 평생 철야 교대 근무를 하고 은퇴한 선배들이 일찍 불행을 맞는 사례를 많이 봤다.


    수면 장애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수면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에 이상이 생겨도 잠이면 낫는다. 피로나 상처에 최고의 처방이 수면효과인 셈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처방전이 수면일 뿐 아니라 슬픔을 견디고 잊게 해주는 최고의 명약이 수면이다. 신생아 때 20시간 이상 수면 상태로 자라고, 어린아이가 자고 나면 달라지는 모습은 성장 촉진제 역할도 한다. 나이가 들어 잠이 주는 까닭도 성장이 멈췄기 때문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최소한 활동 에너지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 잡는다는 말처럼 잠이 경쟁력이기도 하다. 삶이 고달픈 원인이다. 알람 소리에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잠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상처와 아픔을 지우거나 잊고 싶어도 생존을 위해 잠을 양보하고 살아야 한다. 생존과 성장에 절대 필요한 잠이지만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잠을 미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잠과 갈등하다 끝내 잠에 빠지는 삶이나 다름없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수면욕에 의해 자신의 생존을 지키고 살다 수면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떠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인생 시계 1/3 가량이나 수면으로 채우게 된다. 인생이 허무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쉬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시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 드라마가 침묵의 시간으로 러닝 타임 1/3이 편성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럴만하다. 성공이나 감동을 위한 설렘 대신 실망과 허탈의 아쉬운 삶처럼 여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재미없는 인생 드라마 주인공처럼 살고 있다. 엔딩 장면마저 한결같이 편히 잠들어 침묵하는 장면으로 생의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 한다.


     소멸이 생성을 낳는 법이다. 비워야 채워지고 없어져야 탄생도 가능하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생존 원칙이 아닐까 한다. 운명에 생을 맡긴 존재가 생존하는 방식이다. 스스로 알 수 없는 운명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정해진 운명 내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생존하고 있음이 다행이라 여기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오늘도 하루를 맞는 행운을 축복으로 여기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 함께 나누며 애틋하고 오붓한 정을 나누고 사는 게 가장 지혜롭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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