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 햇곰피와 호래기 무침
어릴 때의 나에게 어른이 되는 기준은 키를 훌쩍 키우는 것도 아니요, 어른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맹탕한 물을 마시는 것도 아니요, 혼자 외갓집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정복해야 할 것은 바로 엄마의 '노란 지갑'이었다.
노란 지갑은 부직포 같은 재질의 척 봐도 어느 은행에서 사은품으로 안겨준 것만 같은 모양새였지만, 엄마는 낡고 도톰한 그 지갑을 장롱 속 깊은 곳에 넣어두곤 했다. 가끔 그 노란 지갑이 나올 때면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도통 알 수 없는 장소로 가곤 했는데, 고요하고 차가운 대리석 계단을 올라 처음 눈에 담았던 광경은 빨간 아날로그 숫자들과 역시 뭘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데스크의 어른들이었다.
그때 난 깨달았던 것 같다. '이 노란 지갑을 스스로 정복할 수 없다면 난 어른이 될 수 없어!'
그렇게 어릴 때부터 나름 주식 거래의 현장교육(?)을 조기에 받은 나는 그 후로 몇십 년 동안 주식이란 게 뭔지도 모른 채 경제적 자립을 해버린 소위 어른이 되어버렸다.
노란 지갑만 정복하면 어른이 될 거라 굳게 믿었던 나는, 요즘 내 어른의 시간이 마치 벤자민버튼과 함께 거꾸로 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나보다 앞장서 가며 꽤 인생의 구루라 믿고 있었던 선배들도 나와 같이 허우적대고 있다. 10년을 먼저 살고 겪어도 여전히 확실한 결론은 없었으며, 그들도 갈림길 앞에 늘 갈팡질팡하고 본인들의 선택이 섣불렀다며 후회하기도 했다.
수십 차례 집도되었던 부동산법 난도질의 풍랑을 헤쳐 나오며 집문서를 가져보고, 인생은 미식이라며 몇일치 밥값을 오마카세로 단 번에 해치워버리고, 어른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며 어설픈 갓생 운동을 하다가 입원도 해보고, 이 나라에서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며 법적인 도피처를 마련하고, 남들 다 하는 걸 나만 못할쏘냐며 내 이익을 위해 비릿하고 쓰디쓴 언사도 해보았지만 - 어른이라 대단해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은 그냥 지나쳐가는 작은 경험의 점들에 불과했다.
어른이 되면 교장 수녀님을 똑 닮았던 단아한 몸가짐새가 베고, 적어도 한 치 앞은 내다보며 속 깊은 말을 하고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만 알았다. 오늘도 그와는 반대로 얼마나 세련미로 포장된 차가움과 낭창한 모르쇠 보따리를 던져두고 왔을지 모를 일이다. 미래보다는 그저 닥치는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비혼주의도 딩크도 아니면서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는 (이 나라의 출산율을 걱정하는) 누군가의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여전히 뭔가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최근엔 아주 계획적으로 몇 년간 준비한 것이 막상 달성되자, 누구보다도 무계획적인 사람으로 변신해 버렸으며, "아무런 계획이 없는데요."가 주특기가 되었다.
어른들은 이럴 때 술이라도 마신다던데, 그마저도 탁월하게 알코올 효소를 분해하지 못하는 간땡이를 타고 태어나버렸다. 그래도 이런 어른에게도 나름의 선택지가 있다. 어릴 때 '이 맛을 알면 나는 이미 어른이야'라고 생각했던 음식을 먹는 것이다. 마침 티비에서 나온 그것의 우연한 등장은 더욱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가족방에 곧바로 톡을 했고, 아빠가 수산 경매 시장을 둘러본다 했으며, 며칠 뒤 서울로 올라온 엄마의 손에 제철 생호래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보통 경상도 지방은 호래기를 살짝 데쳐 먹는다지만, 우리 집에선 늘 생호래기를 양념하여 따끈한 쌀밥 위에 척척 얹어 먹었다. 사시 풀린듯한 호래기의 눈알이 무서울법도 했지만 호래기 맛을 아는 나에게 그 정도 위협은 어림도 없었다. 호래기는 오징어의 부드러운 식감도, 낙지나 문어의 찰박대는 쫀득함과도 여실히 다르다. 호래기의 표면은 매우 미끄러워서 입술을 거칠 새도 없이 입안으로 쏙 들어가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차지고 쫄깃한 호래기만의 맛이 있다. 엄마의 양념도 한몫한다. 마늘, 액젓, 파 등 대수롭지 않은 기본양념이지만 짜지 않으면서도 감칠맛을 돋궈 호래기를 밥도둑으로 변신시킨다.
노란 지갑의 정체를 알고도 어수룩한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이렇게 호래기맛을 차지게 아는 어른이 어딨냐며 스스로를 다독거려 본다. 이 나이에도 어른 운운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 난 10년 뒤에도 제대로 된 어른은 못되지 싶다. 그래도 괜찮을 거다. 같이 허우적대는 내 주변의 어른들과 흙탕물 박박 긁는 얘기도 하고, 호래기가 자연산밖에 없어 얼마나 귀한 건데 징그럽다 못 먹는 소릴 하냐며 핀잔도 해줄 거니까.
햇곰피는 지금부터 3월까지가 제철이다. 갈치속젓에 찍어먹으면 정말 별미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호래기무침을 종종 곰피에 싸서 먹기도 한다.
이 모든건 어촌에서 태어난 행운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