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주꾸미 오일 파스타와 케일 크림 펜네
계절은 기가 막히게 본인이 돌아올 곳을 안다.
때늦은 눈, 꽃샘추위 속에서도 포근한 솜으로 외피를 두른 듯 햇살로부터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맘때가 되면 늘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 여고 시절 수녀님과 학교 뒷산에 쑥을 캐러 갔을 때다. 고등학교가 가톨릭계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과목 선생님 중 수녀님들이 몇 계셨고, 교정 안엔 아늑한 스테인 글라스가 있는 작은 성당도 있었다. 이 맘 무렵 어느 미술시간, 아직 공기는 쌀쌀했지만 햇빛은 등을 따사롭게 쪼이던 그날 우리는 쑥을 캐서 쑥떡을 해 먹자는 수녀님의 진두지휘하에 뒷산을 올랐다. 후에 먹었던 쑥절편은 익히 아는 맛이었지만, 아른한 이른 봄에 수업을 제치고 쑥을 캤던 그 설렘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식탁의 꽃은 겨울 구상나무에서 봄 카네이션으로 바뀌었지만, 내 마음의 지표는 여전하다.
'오늘을 가까이하고 내일을 멀리하는 삶.'
눈의 시야와 머리의 시야를 한데 모아 순간에 집중하고, 보이지 않는 너머의 것을 걱정하지 말자는 뜻에서 꾸준히 지켜보려 하는 마음이다. 내게 있어 오늘을 가까이하는 삶은 즐거움에서 비롯된 부지런함이고, 사랑하는 것을 쫓는 것이다. 3월, 한결같이 약속을 지키는 자연이 선물해 준 제철 음식들이 나를 바지런히 움직이게 한다.
마음의 식욕까지 당기게 하는 첫 번째 한 끼는 '그린 파스타'다. 올해는 케일을 썼지만 작년엔 섬초 시금치로 리소토를 해 먹었다. 케일을 소금물에 살짝 데쳐 곱게 간 후, 생크림과 섞어 펜네를 녹진하게 익혀주면 된다. 펜네의 빈속이 싱그럽고 고소한 케일로 들어차, 숟가락으로 소스와 함께 가득 퍼서 먹어야 한다.
2월 호래기에 이어 제철 맞아 물오른 봄 주꾸미도 놓치면 아쉽다. 소금물에 살랑살랑 헹궈 낸 주꾸미를 마늘향 나는 올리브 오일에 빠르게 볶고, 화이트 와인을 부어 상큼한 풍미를 끌어올린다. 봄 주꾸미는 살이 탄탄하게 차오르면서도 육질은 부드러워 씹는 맛이 정말 좋다.
날씨가 따뜻해져서인가, 얼마 전 읽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 인생이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이니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그래서 기꺼이 매 순간 태어나는 쪽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