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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SU Feb 27. 2024

어른이 되면 별 수 있을 줄 알았지

Ep 11: 햇곰피와 호래기 무침

엄마표 양념을 두른 제철 호래기와 갈치속젓과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곰피




어릴 때의 나에게 어른이 되는 기준은 키를 훌쩍 키우는 것도 아니요, 어른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맹탕한 물을 마시는 것도 아니요, 혼자 외갓집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정복해야 할 것은 바로 엄마의 '노란 지갑'이었다. 

노란 지갑은 부직포 같은 재질의 척 봐도 어느 은행에서 사은품으로 안겨준 것만 같은 모양새였지만, 엄마는 낡고 도톰한 그 지갑을 장롱 속 깊은 곳에 넣어두곤 했다. 가끔 그 노란 지갑이 나올 때면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도통 알 수 없는 장소로 가곤 했는데, 고요하고 차가운 대리석 계단을 올라 처음 눈에 담았던 광경은 빨간 아날로그 숫자들과 역시 뭘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데스크의 어른들이었다.

그때 난 깨달았던 것 같다. '이 노란 지갑을 스스로 정복할 수 없다면 난 어른이 될 수 없어!'

그렇게 어릴 때부터 나름 주식 거래의 현장교육(?)을 조기에 받은 나는 그 후로 몇십 년 동안 주식이란 게 뭔지도 모른 채 경제적 자립을 해버린 소위 어른이 되어버렸다.


노란 지갑만 정복하면 어른이 될 거라 굳게 믿었던 나는, 요즘 내 어른의 시간이 마치 벤자민버튼과 함께 거꾸로 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나보다 앞장서 가며 꽤 인생의 구루라 믿고 있었던 선배들도 나와 같이 허우적대고 있다. 10년을 먼저 살고 겪어도 여전히 확실한 결론은 없었으며, 그들도 갈림길 앞에 늘 갈팡질팡하고 본인들의 선택이 섣불렀다며 후회하기도 했다. 

수십 차례 집도되었던 부동산법 난도질의 풍랑을 헤쳐 나오며 집문서를 가져보고, 인생은 미식이라며 몇일치 밥값을 오마카세로 단 번에 해치워버리고, 어른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며 어설픈 갓생 운동을 하다가 입원도 해보고, 이 나라에서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며 법적인 도피처를 마련하고, 남들 다 하는 걸 나만 못할쏘냐며 내 이익을 위해 비릿하고 쓰디쓴 언사도 해보았지만 - 어른이라 대단해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은 그냥 지나쳐가는 작은 경험의 점들에 불과했다. 


어른이 되면 교장 수녀님을 똑 닮았던 단아한 몸가짐새가 베고, 적어도 한 치 앞은 내다보며 속 깊은 말을 하고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만 알았다. 오늘도 그와는 반대로 얼마나 세련미로 포장된 차가움과 낭창한 모르쇠 보따리를 던져두고 왔을지 모를 일이다. 미래보다는 그저 닥치는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비혼주의도 딩크도 아니면서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는 (이 나라의 출산율을 걱정하는) 누군가의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여전히 뭔가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최근엔 아주 계획적으로 몇 년간 준비한 것이 막상 달성되자, 누구보다도 무계획적인 사람으로 변신해 버렸으며, "아무런 계획이 없는데요."가 주특기가 되었다. 


어른들은 이럴 때 술이라도 마신다던데, 그마저도 탁월하게 알코올 효소를 분해하지 못하는 간땡이를 타고 태어나버렸다. 그래도 이런 어른에게도 나름의 선택지가 있다. 어릴 때 '이 맛을 알면 나는 이미 어른이야'라고 생각했던 음식을 먹는 것이다. 마침 티비에서 나온 그것의 우연한 등장은 더욱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가족방에 곧바로 톡을 했고, 아빠가 수산 경매 시장을 둘러본다 했으며, 며칠 뒤 서울로 올라온 엄마의 손에 제철 생호래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보통 경상도 지방은 호래기를 살짝 데쳐 먹는다지만, 우리 집에선 늘 생호래기를 양념하여 따끈한 쌀밥 위에 척척 얹어 먹었다. 사시 풀린듯한 호래기의 눈알이 무서울법도 했지만 호래기 맛을 아는 나에게 그 정도 위협은 어림도 없었다. 호래기는 오징어의 부드러운 식감도, 낙지나 문어의 찰박대는 쫀득함과도 여실히 다르다. 호래기의 표면은 매우 미끄러워서 입술을 거칠 새도 없이 입안으로 쏙 들어가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차지고 쫄깃한 호래기만의 맛이 있다. 엄마의 양념도 한몫한다. 마늘, 액젓, 파 등 대수롭지 않은 기본양념이지만 짜지 않으면서도 감칠맛을 돋궈 호래기를 밥도둑으로 변신시킨다.


노란 지갑의 정체를 알고도 어수룩한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이렇게 호래기맛을 차지게 아는 어른이 어딨냐며 스스로를 다독거려 본다. 이 나이에도 어른 운운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 난 10년 뒤에도 제대로 된 어른은 못되지 싶다. 그래도 괜찮을 거다. 같이 허우적대는 내 주변의 어른들과 흙탕물 박박 긁는 얘기도 하고, 호래기가 자연산밖에 없어 얼마나 귀한 건데 징그럽다 못 먹는 소릴 하냐며 핀잔도 해줄 거니까.



          


햇곰피는 지금부터 3월까지가 제철이다. 갈치속젓에 찍어먹으면 정말 별미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호래기무침을 종종 곰피에 싸서 먹기도 한다.  

이 모든건 어촌에서 태어난 행운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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