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은 약이 아니다.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실습 기간 동안 과제만 주야장천 했다. 이론 교육은 150시간, 실습교육은 830시간, 학술교육은 20시간, 총 1,000시간을 채워야 했다. 그중 가장 많이 부딪히고 배우는 일은 단연 실습교육이었다. 응급위기관리, 중독 질환의 이해, 재난의 이해, 퇴원 계획, 집단활동, 가정방문지도 및 가족교육, 지역사회자원 연계, 정신건강사회복지프로그램 기획 등 현장에서 대상자에게 개입한 것을 보고서로 작성하면 슈퍼바이저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지도하는 식이었다.
수련생이 조각을 빚듯 섬세한 품을 들이는 과제는 '심리 사회적 사정'과 '정신사회 재활치료'이다. 먼저 심리 사회적 사정이란, 정신장애인을 대상으로 수주 또는 수개월 동안 개입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사를 청취하고 현재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부분을 함께 파악해 개선하는 총체적 활동을 말한다. 예를 들어 외모 자존감이 낮아 취업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라면, 자신의 비합리적인 신념을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꾸고 희망 기관에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할 수 있다. 심리 사회적인 환경을 사정(Assessment)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인적사항 수집
- 입원 경위 및 주 호소 파악
- 과거력
- 면접 당시 클라이언트 상태 평가(행동, 위생 상태, 사고, 지각, 감정 반응, 지적 능력, 의식, 병식 등)
- 척도 결과
- 자살시도 이력 및 현재 자살 위험도
- 지지체계
- 가족 성원 및 성격 기술
- 가계도 작성
2. 사정
- 심리 사회적 문제 체크리스트 작성
- 문제 해결을 위한 강점과 약점
- 생태도 작성
- 이론을 통한 사정 및 개입
- 개입 목표 및 계획
3. 수련 사회복지사의 전체 평가
- 소감 및 의견 제시
- 슈퍼바이저 피드백
다음으로 큰 공을 들이는 과제는 정신사회 재활치료이다. '집단상담' '프로그램' 등으로 축약해 말하곤 한다. 병원의 경우 입원 환자, 시설이나 센터의 경우 이용 회원을 대상으로 심리적인 재활훈련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기술훈련, 증상 및 약물 교육, 보호자 교육, 미술치료, 영화감상, 스트레스 해소 등 질병을 예방하고 정서를 환기하는 기능을 한다.
나는 수련 기간 동안 총 여덟 가지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정서관리 / 스트레스 관리 / 일상생활훈련 / 자기표현 / 여가관리 / 문화예술 / 팝송 해석 / 글쓰기치료
자기표현 프로그램을 일례로, 나 메시지(I-message)를 알리고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 전달법은 상황, 감정, 바람을 담아서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화 기술이다. ‘너’가 아닌 ‘나’가 중심이 되는 표현법이다. 참여자 중 한 분은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에게 나 전달법을 활용해 자기감정을 표현했다.
“OO 씨, 자꾸 종교 이야기를 하면 저 너무 피곤해요. 저는 종교에 관심이 없으니까 자제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 부탁을 들은 사람은 "좋게 들리든 아니든 제가 믿는 종교를 다들 믿어주기만 하면 돼요."라고 대답하면서 큰 싸움이 날 뻔했지만, 어쨌든 대인관계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이 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조한 하리(Johann Hari)는 TED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은 약이 아닌 환경 조정이다."
환경 조정이라 함은 우울증 환자가 가난해서 우울하다고 하면 지원금을 전달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고독하다고 하면 자조모임에 초대하는 걸 예로 들 수 있겠다. 즉, 그 사람에게 필요한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는 거다. 앞서 말한 '심리 사회적 사정' 그리고 '정신사회 재활치료'처럼 대상자를 여러 관점에서 분석한 다음 그가 갈망하는 환경과 정서로 조정하는 것이다. 환경 조정은 사회적 치료와도 같다.
영화 스펜서는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삶을 그렸다. 그는 자유를 갈망했지만 요리사, 경호원, 청소 노동자 등 자기를 둘러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감시를 당한다. 이에 폭발할 것만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는 섭식장애로 괴로워하지만 아무도 그 사람의 마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는 다이애나를 지인으로서, 또는 내담자로서 마주했다고 상상해보았다. 솔직히 섭식장애와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 약을 꾸준히 먹으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심정을 진심으로 들으면서 함께 헤처 나가는 그림을 그려 보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만 대한다면 다이애나는 평생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다이애나가 그 집에서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괴롭히던 통제를 깨부수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게 회복을 돕는다. 다이애나에게는 정신과 약이 아닌 ‘자유’가 처방제인 거다. 문제의 본질을 찾고,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찾아 행동하는 일이 약물 치료와 병행되지 않으면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남이 고른 옷이 아닌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입은 다이애나가 광휘하게 웃는 장면이 답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자유라는 환경 조정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다이애나는 음식을 먹고 토하는 삶을 언제까지나 반복했을 것이다.
2022년 1월 27일 (목) 수련일지
환자를 개입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겠다. 그 사람의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면담을 할 때는 그 사실을 잊게 된다. 한 사람의 ‘변화’ 자체에 연연하지 않고 그가 어떤 길로 가고 싶은지 듣고, 또 올바른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그러기 위해 심리 사회적 문제를 진단하고 자원을 동원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상자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을 내가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면담을 통해, 그리고 모금을 알선하거나 자원을 동원함으로써 한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 의미있게 여겨진다. 이러한 직접적 실천을 제대로 하기 위해 수련 과정이 끝나도 '나'라는 인적 자원을 더 크고 단단하게 키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