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ee Jan 30. 2024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용기는 어디서 나올까

   

선배 : 요즘 어떻게 지내?

나 : 저는 다시 대학 다니고 있어요.

선배 : 정말? 회사랑 대학원 다 그만두고?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는데!

나 : 맞아요. 제 스스로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가장 어려워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고민이 끝나고 나니 주저함 없이 행동하게 되더라고요


두 번째 대학입시에 성공하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는 으레 이러한 흐름으로 흘러갔다. 사람들은 직장과 대학원을 포기했던 용기와 대학 입학의 목표를 이룬 것에  대해 축하하고 인정해 주었다. 누군가에게도 퇴사나 이직, 새로운 커리어로 전향하고 싶은 마음이 가끔씩 머리를 내밀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것들을 내려두고 다른 것을 시도하고 이루어내는 것은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선택을 내리기까지 분명 쉽지 않았다. 꽃피는 3월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고민과 조사는 단풍이 물든 9월에서야 결정을 내리며 끝났다. 누군가 어떻게 직장과 그동안의 커리어를 그만둘 수 있었는지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동안의 경험과 경력을 통해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니 앞으로 남은 긴 인생동안 제게 더 나은 길, 행복할 길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과학도가 국제기구를 퇴사하기까지


나는 어릴 때부터 과학을 좋아해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오랜 꿈을 품어왔다. 이 세상에 과학기술을 통해 이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학부 2학년 때부터  연구실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미국 워싱턴 D.C. 인턴십에서의 경험을 통해  정책에 눈을 뜨게 되었고, 대학원에 진학해 과학 관련 정책을 연구했다. 내가 개발한 과학기술 한 가지 보다,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더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적절한 정책을 만드는 것이 세상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과 정책을 모두 아는 전문가가 되어 과학기술분야에서의 국제협력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 진학과 동시에 첫 직장으로 국제기구에 입사했다. 내가 그리는 꿈에 다가가기 위한 좋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몇 개월 동안은 일을 익히고 첫 직장생활에 적응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일에 익숙해지고 앞으로 나의 앞날을 생각해 보니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그동안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만 생각했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이에 대한 고민이 지속되면서 머리가 아팠다. 어떤 선택이든 한 스텝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의 투자가 필요했고 쉬운 길은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제대로 된 고민을 이십 대 후반에야 시작한 것이 늦은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이 가장 이르다고 생각하며 생각을 지속했다. 답답하고 한숨이 나오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가는데  답이 잘 보이지 않았고, 나조차도 잘 모르는 나 자신을 마주하고 파악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운동장에 혼자 놓여 지도를 그려야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과거에 쓴 일기, 그동안 내가 해온 선택 돌아보기, 나를 잘 아는 친구들과의 대화, 자기 계발서 독서, 자기 계발 유튜브 시청을 하며 답을 찾아가려고 애썼다. 그리고  나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했고 이에 답을 내리면서 결과적으로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첫 번째, 나는 어떤 일을 좋아하는가?


나는 실무자로서 다양한 실무를 담당했다. 크고 작은 포럼, 콘퍼런스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일, 세계의 연구자들과 국제기구 헤드쿼터와 협력하여 연구보고서를 만들어 출판하는 일, 개발도상국 프로젝트를 매니지하는 업무 등. 어떤 일은 내가 한 업무의 결과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그 결과를 알기 어려웠다. 반면 어떤 일은 출판처럼 공을 들인 만큼 결과가 빠른 시일 내에 나오고 눈에 보였다. 업무를 몇 사이클 반복해 보니, 성과가 금방 보이고 어떻게 기여했는지 파악할 수 있으며 상대에게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일에서 더 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내가 주도해서 진행하는 업무는 책임감이 무겁긴 했지만 그만큼 더 애착이 가고 몰입해서 진행했다. 자발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그렇게, 내가 어떤 일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나에게 자원을 투자한다면 어떤 선택이 내게 best일까?


 처음 마주하는 실무는 나의 상상과는  달랐다. 실무자들과 임원들을 만나본 결과, 과학분야 국제협력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포지션이 있었다. 국제개발이나 경영분야 전문가로서의 포지션, 해당 과학기술분야의 박사이상 전문가로서의 포지션.  근무하면서 만나는 실무자, 전문가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기면 나는 각 포지션의 특징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곤 했다. 전자에서는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아 매우 뛰어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후자의 포지션은 개발협력에 관심이 많은 과학자가 다수는 아니었기에  비교적 희소성이 있었고 본인의 의지가 있으면 프로젝트에  전문가 포지션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자는 전문적이기도 하지만 비교적 generalist에 가까우며 매니저의 역할을 주로 담당하고, 후자는 specialist로서 전문적 지식을 제공하고 검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매니징에 대한 전문성을 기르는 것, 어떤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도 진행할 수 있는 사람(generalist)이 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필드를 겪어보니  그 분야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면  의견을 제시하거나 자리에 설 때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치 T자형 인재처럼, 과학기술 전문성의 백그라운드를 바탕으로 매니저를 하는 것이 내게 더 적합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그러한 판단이 서자, 나는 선택해야 했다.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을 병행하되 과학분야 전공으로 다시 돌아갈지,  지금 하고 있는 정책분야의 연구를 지속할지를. 길게 본다면 과학기술분야의 전문성을 더 쌓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으나 현재의 전공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졌다. 어디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 좋을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이 분야에서 일하는 나의 삶은 행복할까?


'국제기구 본사에서 일하면 정말 나는 행복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스스로 되물었다. 커리어를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생각하며 살았던 20대 초중반의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다른 중요한 가치들도 선택에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행복하기 위해 추구해야 할 우선순위는 커리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직장을 다니며 처음 스스로 월급을 벌면서 자본이 주는 자유와 이점을 알게 되었다. 돈을 통해 시간과 편리함을 살 수 있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 편히 더 많이 베풀 수 있었다. 문화생활과 교육 등 내가 하고 싶은 경험을 하는 데에도 돈이 필요했다. 많은 월급은 아니었지만 학생일 때보다  더 넉넉하게 지내니 삶의 질이 높아졌고 행복해짐을 느꼈다. 부자가 되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돈이 부족하면 걱정거리가 더 늘어나고 선택에 제한이 생기는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  국제기구는 특성상 계약직을 연장하며 근무하는 형태여서  job security가 불안정함을 감안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외국인으로서 사는 삶을 내가 원하는지 스스로 물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여러 국제경험을 해오면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즐겁고 행복했다. 해외에서 취업하고 외국에서 사는 것이 나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이 삶이 잠깐이 아닌, 지속되는 나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외국인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불편함과 외로움, 차별과  동반하며 살야 한다는 것이 훅 무겁게 다가왔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지낼 때 보다 더 큰  불안정함을 감내해야 하는 삶이 나에겐 덜 행복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스스로를 파악하고 나니 현재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직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방법은 꼭 이 직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제기구 근무를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혹여나  현재의 내 상태에서  큰 변화와 노력을 요하는 일이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가능한 여러 선택지들을 찾아 비교했다. 직업에 있어서 만큼은 나에 있어 가능한 최고의 선택을 하고 싶었다.


현직자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인터넷과 서적에 있는 자료들을 찾아보고 전문기관에 방문해 현황이 어떤지 파악했다.  정보를 수집한 뒤에는 이들 중 내가 즐겁게 임하고 만족할 수 있는 직업, 준비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과 경제적 비용이 적절한지 등 여러 기준을 두고  비교했다. 그리고 반년 넘은 고민은 첫 사직서를 써내면서  마무리되었다.



오늘의 용기가 미래의 용기에 큰 힘이 되길 바라며


사람들은 내가 사직서를 낼 때 용기가 많이 필요했겠다고 말했다. 맞다. 하지만 사실 회사를 그만두는 자체보다 스스로를 알아가고 설득하는 그 과정에서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솔직하게 나를 마주하는 용기, 사랑했던 지난날의 꿈을 내려놓는 용기, 지금까지의 커리어와 다른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는 용기, 그리고 나의 선택과 그걸 해낼 거라 믿는 용기...   가까운 사람들의 진심 어린 격려와 도움, 과거에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성취해 본 경험이 불안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내가 더 행복할 선택을 스스로 내려본 이 경험이 앞으로 또 필요하게 될 미래의 용기에 큰 보탬이 되기를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서른에 대학생 2회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