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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e Feb 07. 2024

마음 놓고 순진할 수 없게 되었다

서른의 첫 방학을 보내며


두번째 대학에서 맞이한 첫 방학, 저에게 특별했던 2021년 여름 그 당시에 들었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서른에 맞이한 첫여름방학


나는 방금 넉넉하고 여유로웠던 방학을 떠나보냈다. 직장생활과 수험기간을 지나고 오랜만에 맞이하는 방학. 그래서 그 해 여름은 더욱 귀하고 달콤했다.


방학의 한가운데인 7월에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새로운 사람들, 알고 지냈지만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 어떤 만남이든 새로운 신분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날 때엔 새로운 마음가짐이 느껴졌다. 자기소개가 달라졌고, 그런 나를 소개할 때면 약간의 쑥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금 더 여유롭고 씩씩한 모습으로. 그런 변화가 좋았다. 걱정하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이 더 많았다.



힘껏 쉽고 여유롭게 지내보았다.


그해 여름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지만 나의 여름에는 에어컨으로 밖의 텁텁한 습기와 치솟는 기온을 모르는 채로 쾌적함만이 존재했다. 평소 밖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이번 방학에는 집에 오래 머물러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유라는 것을 입에 올린 적이 드문 사람은 이제 '나만의 여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정처 없이 한낮의 고양이처럼 소파, 침대, 식탁 앞에서 시간을 물 흐르듯 떠나보내기도 해 보았다. 평소 읽고 싶던 책에 집중하기도 하고 휴대폰을 질릴 때까지 만지기도 했다. 누군가를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시간이 가기를 기대해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시간을 이렇게 사용해도 될까 싶었지만 풀어진 내 모습이 어떤지 알고 싶어 일부러 마음의 끈을 조금 느슨하게 둬보았다.



그동안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 미루어왔던 것들을 해보았다. 운동을 열심히 했고 스스로 이 정도면 운동 중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보았다. 평소에 입어보지 않은 스타일의 옷과 신발을 샀다. 기대보다 별로였던 옷도 있었지만 내게 잘 맞는 옷을 찾았을 때 기뻤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꺼내 정주행을 했고 내 취향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들을 잔뜩 생성해냈다.



직장인 친구들에게 방학이 주어진다면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여행에 가고 싶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애원하듯 여행을 추천해주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만큼 긴 방학을 이용해 가깝고 먼 여러 곳으로, 혼자 또는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안전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나룰 두는 것은 활력이 되었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과거의 나는 멀리 떠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과 발이 늘 필요했는데, 이제는 자동차와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발 아래에 놓인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가 가뿐하게 느껴졌다. 자유라는 커다란 구름이 나의 온몸을 기분 좋게 포옥 감싸는 것 같았다.




학생으로서의 자유와 서른의 책임감 그 사이에서


방학 동안 여유를 부려보면서 안락한 집이 있는 것, 마음대로 에어컨을 켤 수 있는 것, 멀리 갈 수 있는 발이 있는 것, 건강한 것, 정신적인 지지자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하고 소중하며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받고 있는 것들, 갖고 싶은 것들, 누리고 있는 것들을 제 힘으로 얻어내고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즐거웠지만 어떤 때에는 냉정함을 느꼈다. 사람을 평가하고 평가받기 쉬운 곳이며 손익에 따라 움직이는 곳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세상은 냉정하다'라는 문장이 사실적인 클리셰임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세계, 내 업무에만 몰두할 때에 세상의 냉정함을 용케 모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누군가의, 어딘가의 보호 아래에 놓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전지대에 놓여있을 때에는 잘 몰랐지만 평소에 해보지 않은 다른 세상의 일들을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세상의 규칙들을 인정하고 나와 나의 사람들,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강해져야했다. 그리고 그것은 순진해서는 얻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얻은 학생 타이틀이지만, 나에게는 이제 더이상 순진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게 되었다. 순진무구함. 그것은 더 어린 시절의 사람들의 특권이었음을 깨닫는다. 안전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와 세상의 매서움이 두려워 눈을 가리고 외면하면서도 살아날 수 있을까. 학생의 특별함을 십분 누릴 수 있는 기회와 서른을 인지하고 안전을 준비해야 하는 책임감.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고자 노력하고 있다. 자유를 현명하게 누리고 똑똑하게 준비하는 사람, 이왕 다시 학생이 된 것, 그런 학생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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