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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Sep 27. 2021

오래된 부끄러움이 있다

1991,  봄


강의실 창밖으로 벚꽃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전공 수업을 마친 후에도 아이들은 흩어지지 않고 앉아 있었고 마시는 공기는 무거웠다. 과대표는 오후에 시청으로 모두 함께 나가줄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혹 갈 수 없는 이들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왼손 엄지손톱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연신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강남파 아이들이 먼저 못 가겠노라며 말하길 기다렸다. 그들은 잠잠했다. 나는 왼손 엄지손톱을 입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손톱을 물어뜯고 오물거려도 갈 수 없다는, 아니 가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가 공무원이라.....' 떨리는 목젖을 누르며 뱉어버리고 말았다. 혹시 시위에 참여하다 잡히면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아버지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변명이었다. 내 아버지만 공무원 일리도 만무할 텐데 말이다. 그때 아무도 나를 겉으로는 비난하지 않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나를 비난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주 좋은 핑계였다. 나는 두려웠다. 중학생 때 나에게 저렴하게 피아노 레슨을 해준 아랫집 아주머니 집에서 본 비디오의 영상이 스쳤기 때문이다. 조작이라고 생각될 만큼 비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무장을 한 군인들이 시민을 곤봉으로 때리고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은 영화일 거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중학생인 내게 왜 그것을 보여주었는지는 모른다. (아주머니는 광주 조선대 출신이었다.) 사실인 줄 알면서도 일말의 의혹, '국가가 설마'하는 희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오면 자유가 주는 쾌락만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첫 봄에 내가 맞이해야 했던 것은 푸른 나무들이 도끼로 베이거나 태워지는 냄새였다. 나처럼 대학에 들어온 지 두 달 밖에 안 된 '강경대'가 백골단에게 두들겨 맞아 사망했고 전국적으로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저항의 대명사였던 어떤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며 조선일보에 칼럼을 냈다. 변절의 시작이었다.(실은 이렇게도 말할 주제도 못된다, 나는.) 그렇게 죽음의 냄새들이 까맣게 콧 속으로 들어왔는데도 미팅을 나갔고 연애를 했으며 차였다.


축제도 끝나버린 그해 오월 끝자락에서, 불과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지겨워진 그 육교 아래에서 헛구역질이 나왔다. 공허라는 기체가 육신에 꽉 차올랐다. 관념에 몸이 반응했다. 목적도 없이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푯대만을 바라보고 왔기에 허무라는 쓰고도 신 물이 넘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사 년이라는 시간을 이렇게 울렁거리며 보내야 하나.

다행히 그 시절을 누군가들을 사랑하며 구토를 잊었다. 물론 그 사랑이라는 것들도 종국에는 게워내야 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의미'라는 두 글자에 상당한 의미를 두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금욕주의자처럼 행동했다. 현란한 불빛 아래서 춤을 추어대는 이들을 경멸했으며 술을 마시며 허무를 몸소 들이키는 이들을 멀리했다. 그러다 한 친구의 말에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삶이 꼭 의미가 있어야 해?"


'의미'라는 테두리 속에서 내 사고를 규정지었으며 활동의 반경을 그었던 그간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공기를 담아봤자 그 안에 있는 것은 무(無). 의미를 두어봤자 그래서 뭐.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그 '의미'라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한 것들로만 꽉 찬 것이었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술에 취해 현란한 춤을 추어대던 강남파 아이들도 시청으로 향했던 그때,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고 있었나.

우습게도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른 생각을 가졌으니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그러나 타인을 위해 자신 혹은 자신의 것을 내어 줄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 지금의 내가 내린 '훌륭한'의 정의이다. 나는 고작 '겁쟁이'었고, 겁쟁이다.



어제 페이스북을 보다가 '김귀정. 1966년생, 1991년 5월 25일 사망.'이라고 시작하는 누군가의 글이 내 창에 띄어졌다. 어떤 알고리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1991'이라는 숫자가 강하게 나를 끌었다. 클릭하고 들어갔다. 바로 그해, 비겁했던 내가 있던 그 해 오월에 대한 이야기였다. '김귀정'은 처음 보는 이름이었지만 그 속의 이야기는 '강경대'의 죽음과 같았고 중학교 때 아랫집에서 본 비디오의 영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누군가 다큐로 제작했고 개봉을 위해 펀딩을 진행 중이라 했다.


  '좀 전에 확인해 보니 목표액 3천만 원 중 477여만 원(15%) 달성 후원자(펀딩 참여자) 59명. 김귀정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 김귀정 열사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사람이 수십만 명은 될 텐데....'라는 글이 30년 전의 나를, 그 부끄러움을 소환했다.


고작 얼마의 돈으로 마음의 빚이, 오랜 부끄러움이 사라지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남기는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 외칠 용기도, 남길 의지도 없는 나는 이렇게 아주 쉬운 방법으로 그들이 피값으로 내어준 자유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 요 며칠 가을바람이 쓰고도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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