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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Aug 06. 2021

그 애는 날라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내 인생의 날라리들


학교에서 집까지 가기 위해서는 고가 도로에 난 인도를 거쳐 아래로 내려가 버스를 타야 했다. H와 나는 다리 밑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작은 포장마차에서 파는 땅콩 과자를 사 먹곤 했다. 땅콩 조각이 제법 씹히는 땅콩 모양의 땅콩만 한 풀빵이었다. 한 봉지에 8개였는데 4개씩 나누어 먹었다.


우리는 하굣길 친구였다. 교실에서는 각자 노는 친구들이 따로 있었고 하교할 때만 만나서 가는 그런 친구.

친한 것도 아니고 안 친한 것도 아닌 그런 사이.

집으로 가는 그 고가 도로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갔다. H는 외동이었는데 주로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늦게 들어오신다고. 그 말을 하며 H는 작은 돌멩이를 걷어찼는데 발이 꼬여 잠시 비틀거렸다. 바로 옆은 난간이었다.


"야 조심해, 너 없으면 안 돼."

"왜?"

"나 혼자 이 길을 가면 심심하잖아."

"칫!"


우리는 고작 그 정도의 친구였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도 소위 '일진회'같은 무리가 있었다. 우리 반 일진 몇 명은 '짱'인 S가 남자 친구와 사귄 지 백일이 되었다고 교실 뒤편에 앉아 선물을 포장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했다. 중2, 고작 열다섯 살의 아이들은 S를 교주 모시듯 했다.

그 무리의 행적에 대한 소문은 무시무시했다. 도루코 면도날을 입안에 넣고 씹고는 표적이 된 아이에게 피와 침으로 흥건해진 면도날 조각을 내뱉어버린다고 했다.


코흘리개적 동네 친구 한 녀석도 그 일원 중 한 명이었다. 돈 있으면 좀 빌려달라고도 했는데 나는 시큰둥했다. "없는데." 없어서 못줬는지 있어도 안 줬는지 기억은 없지만 내 반응에 녀석은 우물쭈물하다가 무리로 돌아갔다. 우리가 살았던 동네는 뻔했으니 뭐라 추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굣길 친구 H는 예뻤다. 야리야리한 몸집에 막 울듯한 사슴 눈을 가졌고 목소리도 청량했다. 어깨에 레이스가 달린, 다소 유아스런 옷을 입기는 했지만 단정했다. 그 애는 일진 아이들의 무리 지음과 패션을 부러워했다. 그 무리의 아이들은 내가 보기에도 세련되었다. 옷깃은 세우고 머리는 짧게 컷을 하되 앞머리는 살짝 한쪽 눈을 가리는, 아무튼 뭔가 달랐다. 불량끼 있는 세련된 아이들의 무리는 일종의 권력집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날도 우리는 고가 도로 위를 걷고 있었다.


"나 그 무리에 끼고 싶어. 좋아 보여."

"야, 걔들 날라리잖아. 너랑 안 어울려."

"나 날라리가 되고 싶어."

"......, 알아서 해라."


우리는 고작 그 정도의 친구였다.


언제부턴가 나 혼자 고가를 넘어가는 일이 잦아졌고 H의 옷차림은 그 무리를 닮아갔다.

옷깃을 세운 목 위의 얼굴, 그 안에서 웃는 사슴 눈은 나를 똑바로 보지 않고 비켜가곤 했다.

혼자 고가를 넘는 일은 괜찮았지만 다리 밑에서 혼자 사 먹은 땅콩 과자는 다섯 개째부터 목에 달라붙어 그 너머로 가지 않으려 했다.

그 애는, 그 정도의 친구였다.


일진회 같은 무리라 생각했지만 폭행 사건 같은 기억은 없다. 소문과는 다르게 그저 놀기 좋아하며 몰려다니고, 내게는 어렵기만 한 선생님들에게 껄렁대며 농을 치는 정도의 수준이었을 듯싶다. 다행이었다.


H뿐만 아니라 몇몇 아이들도 옷차림새와 머리 모양이 달라졌고 S를 중심으로 한 그 무리는 커져갔다.

아이들은 그 무리를 경계하면서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아이들이 변하는 것을 보며 불안해했다. 어떤 아이는 나를 가리키며 "야, 혜나무같이 저렇게 얌전하고 숙맥인 애들이 빠지면 크게 빠진데."라고도 했다. 나는 피식거리기만 했다. 사슴 눈의 H도 그러했기에 나는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소리 내어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는 그래선 안됐다. 엄마를 이중으로 괴롭힐 수는 없었다. 우리 집에 이미 날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살 터울의 오빠.

중학교 때는 제법 공부를 잘해 우등상도 타 오더니 고등학생이 되자 성적은 고꾸라지고 옷깃을 세우기 시작했다. 날라리는 옷깃으로부터 오나보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아디다스나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목만 있는 폴라가 고작일 텐데 팔이 있는 온전한 나이키 티셔츠며 가방이 오빠 몸에 둘러졌다. 오빠는 엄마에게 월 오천 원만 내면 회원제로 나이키 옷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다며 월마다 따박따박 돈을 타갔다. 어느 날은 나이키 가방에 옷을 잔뜩 넣어가지고 와서는 친구한테 돈을 빌려서 옷을 샀으니 갚을 돈을 달라고 떼를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옷들은 친구가 입다만 이었고 그런 회원제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기타 치며 놀러 다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개수작이었다.


장남인 오빠는 부모님의 기대가 무거웠는지 자꾸만 반대로 갔다. 학교 가방은 가벼웠는데 손바닥과 손가락 끝은 굳은살이 배겼다. 드럼과 기타 연습에 혼신을 다했다. 친구들과 밴드를 한다고 했다. 책상은 책 대신 '다스 프리스트', '스콜피온즈' 등 헤비메탈 카세트테이프로 가득 채워졌다.(그런데 참고서 값은 꼬박 타갔다.) 한가득 모아진 카세트테이프를 엄마가 내다 버려도 또다시 한가득 되는 지겨운 전쟁이 반복되었다.


날라리도 지속 기한이 있는 듯하다. 탈 때는 그렇게 활활 타올라 부모님 속을 까맣게 태우더니 때가 되니 헤비메탈 대신 조지 윈스턴의 'December'가 오빠 방에서 흘렀다. 기타는 내가 차지해 '로망스'를 튕겼다. 오빠는 재수를 하여 모 대학 지방 캠퍼스를 가까스로 갔고 첫사랑이 떠나자 머리를 빡빡 밀고는 고요해졌다.

(지금은 안수집사가 되어 권사이신 엄마의 자랑이 되었다.)


마지막 날라리는 고등학생 때에 왔다.

아침 자습 시간에 맞춰 학교 현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 앞에 한 남자애가 기다렸다는 듯 불쑥 나타났다. 옷깃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 학교 날라리 여자애들이 좋아하던, 좀 생긴 날라리였다.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반짝이는 포장지로 포장한 네모난 물건과 쪽지였다. 나는 그 애 앞에서 쪽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쫙쫙 찢었다. 선물도 되돌려 주었다.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아마 그 옷깃이 내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대시하는 사람이 고작 날라리라니.


자신을 무시한 내 행패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 현관에 멍하게 서있던 내게 우산을 건네주고는 비 속을 먼저 달려가기도 했다.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가끔 등 뒤에서 그 애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졸업을 하고 대학 1학년 봄, 그 애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구는 만나주면서 자기는 왜 만나주지 않냐'라며. (당시 나는 다른 남자 동창을 만나고 있었다.) 옷깃을 세우긴 했어도 ㄱ대학 체육학과에 들어간 것을 보면 나름 성실했나 보다. 학교 근처 경양식집에서 만났다. 신승훈의 노래가 흐르지 않았으면 그 자리를 어떻게 버텼을까. 도대체가 대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놀기 좋아하는 중학생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만나지 말걸. 그랬더라면 등은 저릿한 우수로 그 애를 기억할 텐데.


그렇게 날라리들은 내 인생에서 생겼다 멀어져 가고, 싱겁게 돌아오고, 애잔한 기억이 되려다 말았다.



세상이라는 길을 걷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안전한 길에서 착하다 칭찬받는 다소 지루하고 재미없는 길을 걸었고, 내 하굣길 친구는 헐거운 외로움을 채우려 끈끈한 집단을 향해 간 것이라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탈이었지만 그 속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당시에는 혀를 찰만했던 오빠가 이제와서는 부럽기도 한 것은, 물론 수작까지 부리며 놀러 다녔지만 그 천둥벌거숭이의 시절은 분명 겪지 않고는 모를 많은 이야기들을 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후회되는 것도 '일탈'이라고 일컬어지는 연석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그저 그 위에서 아슬아슬한 맛을 가늠만 했을 뿐 잘 포장된 도로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실패라 여겼다. 달리기 좋은 도로는 시멘트나 아스팔트만 건조하게 뻗어있지만 바로 옆 연석만 넘으면 크기가 다른 돌멩이들이 있고 끝이 갈색으로 여위워 가는 잡초들과 이름 모를 꽃들이 있다. 그 무질서한 무성함들을, 그 재미를 나는 품지 못했다. 이제는 늦었다. 나이는 연석이 아니라 장벽이며 이 나이에 벽을 타고 넘어가다간 볼썽사나운 민폐가 되고 말 일이다. 방황이 아름다운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중학교 졸업 앨범을 오래간만에 펼쳐 그 아이를 찾았다. 3학년 때는 다른 반이었으니 한참을 뒤적거린 뒤에야 볼 수 있었다. 옷깃을 세우고 짧게 커트한 머리카락이 지금도 휘날리듯 경쾌했다. 아이는 활짝 웃고 있는데 사슴 눈을 본 나는 괜히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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