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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Apr 30. 2022

학교를 결석시키고 여행을 떠나는 기분

무단과 미인정의 사이에서



시동생이 부산 여행을 가자고 제안해 왔다. 어디 보자, 중3 아들이 5월 6일 하루만 체험학습을 신청하면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까지 3박 4일 여행이 가능하다. 아이 중간고사도 5월 4일이면 끝나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화되어 정말 최적의 시기다. 대학생 딸도 6일 수업은 땡땡이가 가능하다고 해서 흔쾌히 동의했다. 직장 다니는 가족들은 6일 휴가를 냈고 해운대 뷰의 아주 널찍한 숙소를 예약했다. 오랜만의 가족 여행이라 설레었다.


그런데 아들의 중간고사 시행 알림문을 다시 보다가 아주 중요한 사항을 간과한 것을 알았다. 시험 후 3일 이내는 '성적 이의신청기간'이라 체험학습신청이 불가하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의신청을 포기한다고 해도 체험학습은 불가하다. 가족들이 휴가까지 냈는데 정말 난감했다. 왜 아들 학교는 다른 학교들처럼 징검다리 휴일에 낀 6일을 재량휴업일로 지정하지 않았는지, 유연성 없는 학사 운영이 원망스러웠다.


아이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공지한 바대로 체험학습은 불허하고 결석을 하게 되면 '미인정' 결석이라고 했다. 미인정 결석이라는 말이 생소해서 물으니 '무단' 결석이라 확인해 주셨다. '무단', 이 얼마나 어마 무시한 단어인가. 규정을 검색해보니 2019년에 '무단'이라는 범법적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단어 대신 '미인정'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기부에 기록하는 용어만 완화되었지 해당되는 규정의 세부사항들은 '학폭 관련 출석정지, 범법행위로 인한 책임 있는 사유로 결석한 경우, 태만, 가출, 출석 거부 등 고의로 결석한 경우'와 같이 겁나는 내용들 뿐이다. 미인정 결석을 하게 되면 아들은 졸지에 태만하고 불성실하며 법을 위반한 아이 중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지역 맘카페이다. 타인의 경험은 의사 결정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자녀교육에 몰입도가 높은 이 지역 엄마들의  인식과 정보는 상황 파악에 큰 도움이 된다. 카페에 들어가 '중학생 미인정 결석'을 검색한다. 내신에 약간의 감점은 있으나 특목고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는 의견이 많았다. "그 당시에는 저도 많이 망설이며 감행했었는데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 다녀오세요"라는 글은 캡처까지 했다. 예상외로 학교 규율에 절대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물론 고등학생이라면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출결사항이 대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래 아직 중학생이니 이번 딱 한 번 만이다. 한 번만.


큰아이 때라면 절대 행하지 않았을 일을 감행한다. 실은 나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다. 어떻게 감히 아이를 학교 결석까지 시키면서 여행 갈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이가 학교 규칙을 어길까 봐, 선생님들 눈밖에 날까 봐 노심초사 벌벌 떨던 그 여인은 어디로 갔는가. 둘째라서 느슨한 걸까.

아마도 생활기록부에 '무단결석'이라고 기록된다 이번 여행을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단(無斷)은 '사전에 허락이 없음, 또는 아무 사유가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무단결석'에서 '무단'의 주체는 결석한 학생이다. 그러나 '미인정 결석'은 사유가 있어도 그 사유를 학교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니 '미인정'의 주체는 학교다. 용어의 주체가 달라지니 숨 쉴 틈이 보인다. 물론 미인정 결석도 아이 내신에 감점을 받기에 별반 차이는 없지만 감행하는 입장에서는 불쾌감 내지 불안감이 덜하다. '아'와 '어'는 엄연히 다르니까.


벌벌 떨던 그 여인은 어느새 삶에 대한 시선 혹은 사고의 방향 변한 것도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내 아이를 어떻게 볼까를 걱정하며 딱딱하기만 했던 근육이 언제부턴가 아이에게 어떤 것이 인생의 행복한 요소가 될까를 생각하게 되며 몰랑해진 듯하다. 기록보다는 추억이 아이의 세계를 풍요롭게 해 줄 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어느새. 글을 쓰게 되면서부터.

물론 아이 중학교 생활기록부에 기록될 '미인정'이라는  음절이 무척 찜찜하다. 아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음절만을 보고 아이의 성실성을 오해할까도 걱정된다.

왜 각자의 사정이 몇 가지로 규정된 사항으로만  귀속되어야 하는지. 결석을 미인정, 질병, 기타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결석' 하나만으로 기록하고 세부사항으로 설명하면 안 되는 것인지. 이 말을 딸에게 했더니 그러면 여행도 못 가고 학교 규정에 충실한 아이만 억울하다, 안 된단다. 그럴수도 있겠다. 부모로서 잘한 결정인지 아직도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남아있다. 그러나 아들은 마냥 신나 있다. 녀석은 진즉에 '중학교 생기부를 누가 봐요'라며 고민 따위는 하지도 않는다. 시부모님께는 혹 걱정하실까 봐 아이 결석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으니까.


갈등되는 상황이 없었으면 생각지도 않았을

'무단''미인정'의 사이에서,

이렇게 미묘한 차이를 지닌 수많은 언어들의 뒤에는 얼마나 다양한 상황들이 숨어 있을까를 생각했다.



어제 아들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반에서 결석을 하고 여행을 가겠다고 한 친구가 다는 것이다. 동지가 생겼다. 나는 박수까지 치며 기뻐했다. 그만큼 두렵기도 하나보다.


아이를 학교 결석까지 시키며 여행을 떠나는 기분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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