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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Apr 14. 2022

단무지와 베이컨 그리고 길 위에서의 소회

주의. 음식이 아닌 진심에 관한 이야기


진심과 본심 1



"그건 불가능한 거 아니에요?"


나의 꿈에 대한 아들의 반응이다. 에둘러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질문의 형태는 취했으나 답을 내포한 아이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상징적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 그저 웃고 만다. 아, 웃음이란 얼마나 모호하면서도 적확한 내면의 표출인가. 인정하면서도 인정하기 싫고 서운하면서도 서운하다고도 할 수 없는, 희망하면서도 낙담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외려 나는 정말 유쾌하게 웃었다.


'할 수 있어.'라고 힘주어 말해주던 남편의 눈가와 입가가 우물쭈물 방황한다. 눈과 입은 진심을 담지만 눈와 입는 본심을 드러내기 일쑤다. 무구하게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아이보다 내 눈치를 살피는 남편의 표정에 난 더욱 절망하고 만다. 그러하기에 '세상을 움직이는 건 진심이 아니라 본심'이라고 김승희 시인이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에서 그렇게 슬프게 읊은 거다. 사람이 갈구하는 건 진심이면서도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본심이기 때문이다. 진심보다는 본심에 '진실'이 있다는 듯.


나의 꿈은, 그 진심은 '작가(소설가)가 되고 싶다'라는 것이고 본심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라는 것이다. 그러한 나의 본심을 정확히 간파한 아이의 물음에 나는 왜 말도 못 하고 웃기만 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낙담하면서도 왜 때려치우지 않는 걸까. 아마도 나의 갈증은 소설가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것이고 그것은 내 본심과도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진짜?). 그러하기에 가던 길을 그저 가는 것이다. 가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절망으로 절뚝이면서도 그 길의 향기를 맡고 싶은 거다. 그 길에 놓인 것들은 정녕 황홀하다. 모르는 것 투성이라 설렌다. 나의 무지를 깨닫고 알아가는 과정에는 환희가 있다. 돈키호테의 그 슬픈 몸짓을 알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가 왜 아름다운지를. 소설은 도달할 수 없는 총체성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하기에 '불가능함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나의 길은 얼마나 소설적인가.(라고 위로해 본다.)


늦은 밤에 걷다 보니 곧잘 돌부리에 걸리곤 한다. 이 문장에서 방점은 '늦은 밤'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책날개를 펼치고 작가가 언제 등단했는지를 살핀다. 대부분 아무리 늦어도 40대다. 일간지들의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아주 드물게 50대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출신에 구력은 20년 이상이다. 이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열여섯 살 아이라도 불가능의 큰 요소중 하나가 '나이'라는 것쯤은 쉽게 간파하는 것이다.(물론 구력에 상관없이 소설가나 시인으로 타고난 사람들은 분명 있다. 서사와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너무도 부러운 이들이.) 많은 학생들이 만학도라는 것을 아는 교수들은 아주 드물게 진주처럼 박혀 있는 20대의 학생들을 대하게 되면 얼굴이 환하게 핀다. 그 이유를 왜 모르겠는가. 나라도 그럴 텐데.


내가 문예창작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지인들은 '어머, 너무 잘 어울려요. 잘하실 것 같아요.' 하며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그러다 가끔 만나서 안부를 전할 때면 '공부는 잘 되어가세요? 정말 멋진 취미 생활이세요.'라고 말한다. 20, 30대의 사람이 문창을 전공한다면 '취미'라는 단어를 섣불리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서글퍼진다. 그러나 '가능성 희박'에 대한 것이 나의 본심이기도 하기에 또다시 웃고 만다. 그러면서 나는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아니 잠 속에서도 진심을 향해간다.



진심과 본심 2


"나 정말 L을 질투했거든요."


L은 대학 3학년인 딸의 절친이다. 노래, 연극, 글쓰기 등 예술적 재능은 물론 영어도 유창하다. 휴학 중 스타트업에서 인턴으로 있다가 휴학을 연장하여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스타트업이냐고 물었으나 모른다는 딸의 대답.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도 물어보지 않았단다. L도 말하지 않고. 요즘 애들은 다 그런가, 하며 넘겼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자신보다 많은 면에서 앞서가는 절친에 대해 딸의 질투심은 커져만 갔고, L은 그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러면서도 둘은 죽고 못 산다. 서로를 너무 좋아해서 둘이 사귀냐라는 농담도 했었는데 L은 남자 친구도 있단다. 그런데 얼마 전 L이 1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이 바뀌면서 L은 시달렸고 번아웃에 우울증까지 왔다. 아이 방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니 둘이 통화하면서 웃다가 울다가 난리다.


친구라면서 L이 괴로워한 것도 몰랐다고 딸은 자신의 질투심을 부끄러워했다.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인데 온전히 그 마음으로 일관되지 않아 괴로웠다고.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내게 다음 문장을 보여주며 운다.


  누군가의 슬픔을 알면, 정말 알면, 무엇도 쉬이 질투하지 않게 되는 법이니까. 어려운 형편은 모르고, '좋아 보이는' 면만 어설프게 알 때 질투가 생긴다.

  ( 박연준 산문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중에서)


누군가의 슬픔을 알게 된 순간 진심만 흐르게 된다. 질투 같은 고체성의 마음은 사라지고 사랑만 가득하다. 뼛속까지 노란 단무지, 앞뒤가 같은 베이컨은 오랜 시간 소금에 절여 있었다지. 진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들처럼 '염장'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단무지도 베이컨도 될 수 없는 우리들은 타인의 슬픔을, 그 소금기를 눈치채야만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본심이라지만 두 마음의 괴리를 괴로워하는, 진심으로 가닿으려는 본심들의 분투가 있어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 딸의 눈물처럼.


.



*루카치의 말


해질녘 고요한 호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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