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는 좀 게으르다. 어쩌면 이건 순전히 엄마 탓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엄마는 가느다랗고 기다란 내 손을 잡고 "아이고 이 손 좀 봐, 게으르게도 생겼네"하며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그 눈빛과 손길이 햇살처럼부드럽고 따뜻해서 게을러도 예쁨을 받는구나 하고 생글댔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아니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방바닥에 먼지 좀 굴러다니면 어떻고 설거지통에 그릇 몇 개정도 쌓이면 좀 어떤가. 그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이 해결하면 된다. 그래서 맞벌이 하는 동안에는 남편이 집안일을더 많이 했다. 물론 잔소리 따발총은 날아다녔지만 차라리 맞고 말 일.
퇴사를 하면서 남편에게 공약한 바가 있다. 맞벌이를 핑계로 늘 어수선했던 우리 집을 잡지에 나오는 집처럼 깨끗하고 예쁘게 꾸밀 것이라고.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레이스 달린 홈드레스를 입고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서 내놓겠다고.
처음엔 그랬다. 재미있었다. 집안 구석구석에 쌓여있던 먼지들을 닦아내고 가구 배치도 이리저리 바꾸어 보고 아이들의 방을 정리해 놓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래 내 손길이 닿으니 이제야 집이 집 같네, 하며. 반찬도 그날 먹을 만큼만 조물조물 만들어 놓았다. 나의 퇴사를 못마땅해했던 남편도 "자기가 집에 있으니까 좋은 것도 있네." 하며 슬쩍내옆구리를 쳤다.
남편과 아이들을 각자 가야 할 곳으로 보내 놓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널어놓고 나면 오후 서너 시가 되었다. 정말 별로 한 것도 없이 하루가 후딱 지나가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시간이 더 빠르게 흘렀다. 일주일은 더 빨랐다. 어쩌면 긴장해서 일어나야 할 아침이 사라져서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그때는 늘 아침이 두려웠으니까.
그런데 좀 이상했다. '나는 없고 일만 떠다녔던 무상함'이 퇴사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는데 어느 날 오후에 빨래를 개다가 그 낯익은 공허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거였다. 남편이 퇴근 후 들어오면 "나 하루 종일 집에서 일하느라 힘들었다"라고 해도 그는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그래? 뭘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라고 했다. 울분했다.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티가 안나는 것이 집안일이었다.
그렇게 공허의 무게를 떨치기 위해 시작했던 글쓰기가 만 2년이 되어 간다.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느 날부터 나는 종일 글만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어쩌면 밥을 먹는 것도 글을 쓰기 위해서다. 설거지를 하며 어제 쓴 문장을 되뇌고 머리를 감으며 다시 지운다. 내 글이 헐겁게 느껴져 읽어야 할 책이 늘어만 가고 가끔 오시는 영감님이 놓고 간 땔감은 젖은 장작인지 불을 붙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언제쯤 바짝 마른 참나무를 갖다 주실 런지.
나만의 시간이 좀 더 길어야 했다. 그래서 수를 썼다. 아이들 챙기는 일 외의 집안일은 해도 티 나지 않으니 남편이 퇴근하기 전인 오후 다섯 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밥을 안쳐놓고 반찬을 만들고 청소기를 돌린다. 그쯤에 남편이 온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해치운 후 걸레를 빨아서 손에 든다. 그리고는 남편이 침대 헤드에 기대어 유튜브를 보고 있는 안방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엎드려 걸레질을 한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빡빡.
"낮에 뭐하고 지금 하는 거야?"
"청소해도 티 안 난다며. 그래서 자기 보는 앞에서 하는 거야."
인생은 어차피 '쇼'다. 보여주는 거다. 방바닥을 열심히 닦고 일어선 후 헥헥거리며 그다음 목적지인 거실로 향한다. 뒤통수에서 그가 잔소리를 날리거나 말거나. 처음에는 듣기 싫었는데 반복되니 바람소리 같다.
이렇게 전적으로 2년 동안 글에 매달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책을 출간하지도 등단하지도 못했다. 인생은 보여 주는 거라면서 아직 보여준 것이 없다. '출간 소식', '등단'이런 제목으로 올라오는 글을 접할 때마다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출렁인다. 그러나 '잠시'다. 잠시이어야만 한다. 가느다랗고 기다란 내 손을 탓한다. 엄마를 탓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능력을 탓하고 그만둘 것만 같아 두렵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설레게 하는 것을 만난 적이 없다. 이런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진저리가 나 돌아서도 다시 노트북을 펼친다. 사랑에 빠지면 그 대상에 몰두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 그러하기에 전업작가도 아닌 전업주부이면서 밥하기보다 쉬운 것이 글쓰기인것이다.
물론 여느 (짝)사랑이 그렇듯 절망과 불안은 포도원의 작은 여우처럼 찾아든다.나의 사랑을 허물려한다. 아직 꽃도 피지 않아 향기도 나지 않는데 들어와서 바스락댄다. 차라리 게임을 하라는 아들과 좀 더 생산적인 일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라는 딸의 은근한 비웃음에 자존심이 상한다. 다행히 아직 남편은 참아주는 편이나 "전업작가도 아니면서 종일 그러고 있냐"라고 짜증을 낸다. 하긴 입장을 바꿔서 바라보면 그렇기도 하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 몸이, 영혼이 이 짓을 갈급하는 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사랑을 어쩌란 말인가. 나를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같지 않은가. 이러한 고독은 특별한 고독이다. 매일매일 자신의 재능에 절망을 느끼며 글을 쓴다고 하자. 그 얼마나 화려한 절망인가." - 전영주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 중에서.
*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다 발견하게 된 전영주 시인의 글쓰기 책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에서 제목을 빌려왔습니다.
이 책은 '야릇한 제목'(황현산 선생 표현)이 암시하듯 전업주부 맞춤용 글쓰기 입문책입니다. 20년 전 출판된 책이라 시대에 맞지 않는 내용들도 있지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글에 힘이 들어갈 때, 그리고 절망스러울 때 가볍게 펼쳐보면 좋겠습니다. 아쉬우니 목차에서 눈에 띄는 제목을 살짝 스포 해 봅니다.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