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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Jun 16. 2022

불안



내 기저의 감정은 가볍고 무겁다. 무언가를 하지 않은 듯한, 무엇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찜찜함이 흐린 날 물안개처럼 부유한다. '불안은 욕망의 하녀'라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의 손은 대체로 파리의 그것과 닮았다. 결핍을 메우려 연신 비벼댄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선생님께 이름이 불리지 않는 날이면 시무룩했다. 선생님이 '나'라는 존재를 잊은 것 같은 '서운함'은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칭찬을 받거나 심부름을 하는 아이들을 질투하고 시기하기도 했다. 특히 엄마가 학교에 찾아오는 아이들을. 나의 엄마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처음의 순간부터 아팠다. 시퍼런 입술로. 가난한 남자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은 더욱 그녀를 처연하게 만들었다. 엄마에 대한 불안은 슬픔이라 불리는 더 깊은 불안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시퍼런 입술은 붉은빛을 되찾아갔지만 가난이라는 병은 내 얼굴에서 분홍빛을 앗아갔다. 밤마다 들려오는 부모님의 다투는 소리만큼 어린아이를 제 속으로 파고들게 하는 것은 없다. 무엇이라 부를 수도 없는 진동에 떨며 그 긴 밤을 날 것으로 앓았다. 검푸른 시간들이 내 눈 밑으로 스몄다.


나는 안으로 파고드는 내 성격이 못마땅했고, 부끄러웠고, 불안했다. 아이들과 모처럼 수다를 떨고 나면 채워지는 허무의 무게가 싫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인기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고 또 시기했다.


내가 지닌 불안의 근원을 찾으러 기억들을 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에서는 찾아낼 수 없는 내 몸에 파고들었던 실체적 소리들,  눈물들의 파장이 내 속으로 들어와 이미 새겨진 것이었음을 어느 날 새벽, 화장실에 있다가 깨닫게 되었다. 새벽이라는 시간과 화장실이라는 공간이 어떤 맥락으로  불안의 근원을 알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순수의 시간과 배설의 장소에서 내 몸은, 영혼은 응답을 받은 것이다. 응답을 얻었다고 해서 불안이 가시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기처럼 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공기가 있어야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듯 불안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하며, 때로는 역동적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물론, 불안은 유쾌한 감정이 아니므로 우울이라는 안개를 동반한다. 그 안개는 내 얼굴에 드리워져 있다. 지금은 많이 걷히긴 했지만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서부터 '찡찡한' 표정의 내 세계를 못 마땅하게 생각해왔다. 의식은 알지 못하는, 나를 지배했던 너머의 세계는 그렇게 나를 안개처럼 모호하게, 흐리멍텅하게 드리워지게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아침에 일어나 학교를 가기 전 거울을 보면서 '자신감을 가져. 넌 오늘도 잘 버틸 수 있어'라고 속으로 외치곤 했다. 세상 속에 던져진 내 존재에 대해 불안했고, 불만이었다.


밝은 표정의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행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여 얻은 칭찬들에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때로는 자만심으로 어리석은 허공을 날기도 했다. 그러나 곧 추락하지 않는가. 나는 아직도 불안하다. 불안을 피해서 퇴사도 하였지만 여전히 못 마땅하고 여전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끈질긴 생각들이 엮여있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부도 명예도 심지어 사랑조차도 허무하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갈구하고 있는 것인가. 끝이 없는 갈증 속에 살아가고, 그래서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을 알고 신에게 물어보지만 얄팍한 믿음은 가볍게 흔들리고 붕어처럼 매일매일 순간순간 복기해야 할 말씀이 있다. 아직도 입과 가슴이 따로 노는 '회칠한 무덤' 같은 껍데기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언제고 내쳐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서.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낮아지는 방향으로, 안정된 형태로 되기 위해 반응을 하거나 움직인다.

시내로 흐르는 물, 새들의 짝짓는 소리, 꿀벌의 긴 여정, 피고 지는 우주의 별, 그 모든 것이 그렇다.

불안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들이다.


떨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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