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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Jul 27. 2023

'다 그렇다'라는 말

 일상화된 폭력



"엄마, 나 회사 그만두면 안 될까?"


특성화고에 다니던 소희는 대기업 통신회사 콜센터에 취업을 했다. 실은 대기업 하청의 하청 회사였다. 콜센터 상담원들은 고객들의 통신 해지를 방어하고 새로운 상품에 가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어떠한 진상도 참아낼 수 있어야 했다. 조직에서는 사람보다 숫자가 우선한다. 어느 조직이든 관리급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실적'일 것이다. 일반고는 대학 진학 실적, 특성화고는 취업 실적, 회사는 매출 실적, 공무원은 민원 해결 실적.


춤추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고작 열여덟 살의 소희는 설레며 입사한 회사에서 일정 실적을 달성해 내야 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빽빽한 사무실은 사람 냄새 없이 차가운 악취만이 진동하고 있었다. 자살한 전 팀장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견뎌야 했고, 견디고 싶었다. 진상 고객들의 배설을 참아내고 야근까지 하며 실적을 끌어올렸지만 그에 대한 인센티브는 애당초 소희 같은 '실습생'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거였다. 회사는 특성화고의 현장실습생들을 악용하고 있었다. 부당함을 참지 못한 소희는 팀장에게 주먹을 날렸고 3일간 직무정지라는 징계를 받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소희의 구조 신호를 가난한 엄마는 못 들은 척 얼버무렸고 학교 담임은 실적 압박에 선생의 도리를 망각했다. 놀기 좋아하는 아이의 푸념이라 여겼을 것이다. 우리는 간혹 타인의 애처로운 소리를 외면한다. 당장의 초라한 현실에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가 왜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지 물어야 했고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출구 없는 터널 속에서 도대체 누가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까.


아이의 퍼런 주검 앞에서 울부짖는 부모에게 형사가 물었다.

"그 일이 뭔지 아세요?"

"몰랐어요, 정말 몰랐어요...."

알았더라면 아이에게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을 것이다, 부모니까.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 그렇게 사회 생활하는 거라고, 버텨보라고, 강해지라고 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네게 있는 거라고.



"일은 할 만해?"

"제가 못 참고 욱하는 바람에..."

"또 욱하면 누구한테라도 말해. 나한테라도. 괜찮아. 경찰한테 말해도 돼."

"고맙습니다...."

형사는 소희의 남자 친구를 찾아갔다. 특성화고 출신인 그 또한 '욱하는 바람'에 징계를 받고 근신기간에 택배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형사의 말에 고맙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이 '욱한' 고통을 들어주고 폭력을 막아주어야 할 어른이었다.


영화 <다음 소희>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다 그렇다'는 말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좋아지려면 여린 사람들을 존중하고 여린 것들을 섬세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 문화가 없으니까 고인의 죽음을 두고 '여린 친구가 몇 대 맞더니 심약하게 죽었다. 누군 입술 터지면서 그냥 다니고 인생이 그런 거지. 다 그렇게 알고 다니는데' 이런 해석이 나와요. 우리가 섬세함을 섬세하게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 일상이 폭력화돼 있는 거예요" (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P.117,118)



조직은 거대하고 단단해서 개인이 저항하기엔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그 안의 부조리가 그나마 개선될 수 있는 여지는 '누군가 죽어나가야' 생긴다. 물론 누군가 죽어나가도 그 죽음을 우울증이나 개인의 심약으로 치부해 버리면(혹은 위장하면) <다음 소희>에서 처럼 죽음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최근 한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은 소희의 죽음과 흡사하다. 언뜻 보면 진상 고객과 학부모가 두 죽음의 가장 큰 원인 같지만 근본적 원인은 조직의 부조리, 폭력에 있다. 감당해 낼 수 없는 살인적인 업무, 실적 최우선의 시스템이 원인이다. 무엇보다 더럽고 위험한 작업, 악성 민원 등의 기피 업무를 조직에서 가장 힘이 없는 이들이 감당해 내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목소리마저 크게 낼 수 없는 신입, 계약직, 기간제 인력들이. 그들이 힘들다고 하면 조직의 대리인들은 '다 그렇게 버티면서 가는 거'라고 위로하는 척한다. 아무런 보호와 개선 의지 없이 얼버무리고 말뿐이다. 즉, 이들 죽음의 제1의 가해자는 조직이다. 물론 '진상 인간'도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단지, 정도만 다를 뿐 학부모이자 고객인 나 또한 진상이었거나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니, 떨쳐내지 민감해져야 겠다. 인간은 무뎌지기 일쑤니까.


조직에서 사람은 늘 돈에 밀리기 일쑤다. 산업현장에서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인명사고는 대부분 돈의 문제이다. 안전설비 미비, 인원 부족이 다 돈 때문이다. 2인 1조 규정의 현장작업을 혼자 처리하려 한 이유는 안전의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회사에서 인원을 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구의역의 김 군이 그랬고 2018년 발전회사 협력업체의 김용균이 그렇게 혼자 작업하다가 희생되었다. 두 사람 모두 나이 어린 비정규직이었다. 산업안전 관련 법을 강화해도 '다음' 희생자는 계속 나오고 있다. 사업주들은 법을 지키는 시늉만 하며 주머니의 돈부터 세고 있는 것이다.


나는 21년간 에너지 공기업에서 일했었다. 그래서 김용균 군이 어떠한 상황에서 희생되었는지 눈에 보인다. 선배들이 '다 그렇게 했듯이' 본 대로 '혼자서' 위험한 몸짓을 했을 것이다. 본청인 발전회사는 주 설비 운전과 관리감독을 하고 보조설비 운전과 모든 설비의 정비보수는 협력업체에게 위탁한다. 협력업체 계약은 3년에서 5년을 주기로 경쟁입찰에 의한다. 낮은 입찰가가 경쟁력이 있기에 업체들은 인건비를 낮추게 된다. 그래서 2인 1조의 규정을 지키기에는 인력이 모자랐던 것이다. 김용균은 구의역 김 군의 '다음 소희'였다.


요즘과 같은 폭염에 뜨거운 현장에서 검은 땀을 흘리고 작업하는 협력업체 직원들을 마주한 때가 있었다. 죄책감이 일었다. 사무실에서 설비보수 독촉 전화만 할 줄 알았지 그들의 아슬아슬한 몸짓은 외면했었다.


통신사, 쇼핑몰 콜센터 직원들에게 짜증을 낸 적은 없었던가. 전혀라고 말할 수 없다.


김용균들, 소희들의 죽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표지사진 : 영화 <다음 소희>의 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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