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오빠 이거 버린다?"
"뭔데"
들고 다니기엔 조금 무겁고. 둔탁하게 생긴 낡은 노트북. 나는 처음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리지 못했다.
"버리지 뭐."
담배 한 모금 빨아들일 정도의 시간.
"잠깐만. 내가 가져갈게."
"뭐야. 고장 난 거 아니었어?"
"안에 중요한 게 있어서."
"뭔데?"
"별 것 아냐. 자긴 신경 쓰지 마."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닐 것이다. 별 것 아니어야 한다. 내가 그녀의 물건을 아직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떠올랐다기보다는 떠올려졌다. 공교롭게도 곧 내 아내가 될 사람에 의해.
별 것 아니라고는 대답했지만 나는 그 노트북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실은 이 노트북을 다시 챙기게 된 것도 그 작은 호기심에 있었다.
요즘 사람 답지 않게 겉치레 신경 안 쓰고 사람을 밝게 대하던 그녀. 약간은 천박하게 느껴졌던 그녀. 사랑한다는 낯간지러운 말을 참 당당하게 하던 그녀. 담배처럼 타들어가 연기처럼 날아가버린 그녀. 내게는 처음이었던 그녀. 이 노트북은 그녀의 분신이었다.
"저기.. 죄송한데 전화 한 통화만.. 쓸 수 없을까요.."
까까머리 군복의 사내는 사나운 인상과 다르게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노란 머리의 여성은 껌을 잘근잘근 씹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쓰세요. 요샌 공중전화 찾기도 힘들죠?"
"가.. 감사합니다."
"좀 더 웃고 다니세요. 인상도 안 좋으신데."
군복의 사내는 더 순박한 미소와 함께 이미 수천번은 더 눌렀을 숫자를 다시 더듬었다. 몇 번의 통화연결음 이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많이 바빴나 봐. 연락이 안 되더라. 그.. 나 지금 휴가 나왔어. 어디야?"
순박한 표정으로 전화를 빌려갔던 사내는 그 짧은 사이 무너져서 돌아왔다. 울먹이는 사내에게 전화기를 받아 든 그녀는 주머니에서 껌 한통을 건넸다.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예..?"
"딱히 드릴 건 없고..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한 잔 사주실래요?"
"네..?"
생일. 전화번호 뒷자리. 이름. 살던 동네. 방전돼버린 노트북 전원을 충전하는 사이. 그녀 덕분에 참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이 노트북의 시작화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힌트 : 나.'
말은 쉽다. 그래 너. 네가 잊고 간 이 노트북. 대체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지독하게 궁금했던 그 시절에도 나는 그랬다.
너에 대한 모든 것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나는 이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집 전화번호, 우편번호, 심지어 너의 주민등록번호까지. 너에 대한 모든 걸 써넣어도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가 연애했던 그 시절처럼 나는 여전히 네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고, 너는 한 번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힌트 : 나.'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그 시절을 떠올렸다. 늘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노트북. 그 시절의 나는 이걸 가지고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널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나랑 잘래?"
"뭐?"
군복의 사내는 이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테이블에 기대어 깊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테이블 너머의 여성은 기가 차다는 듯 웃어 보였다.
".. 싫어?"
"아직은."
"아니.. 씨.. 아직은 뭐야 아직은 이.. 그럼 나한테 왜 술 먹자고 했어."
"그냥 위로해주려고 한 거지."
"너도 생각이 있으니까 다 그런 거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그래 보여. 너를 딱 보면."
여성은 쓸쓸한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너는 꼭 다아시 같다.."
"그래.. 너도 나 싫다는 거네 그치.."
그러나 이미 군복의 사내는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 중얼거렸다.
"됐다 그래.. 꺼져 다.."
낡은 서랍에서 노트북을 찾은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비밀번호를 입력해보지 않았다. 노트북을 열고 입력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참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노트북이 있었는지도 잊었는데 지금은 그녀와 관련된 추억들이 계속해서 피어난다.
좋아하던 영화, 늘 마시던 커피, 내 방에 와서 늘 입던 티셔츠, 늘 쓰던 클렌징 오일.
밝고 구김 없는 성격의 그녀는 마치 버릇처럼 내게 사랑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숨 쉬듯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그 말이 멈췄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쯤이었다. 그녀가 내게 이별을 고한 것은.
"나 사랑해?"
"응"
버릇처럼 내뱉는 사내의 말은 운동선수의 루틴처럼 막힘이 없었다.
"그럼 결혼하자"
"말했잖아. 아직 힘들다고. 좀 더 자리 잡고 하자."
메마른 음성으로 말하는 사내의 눈은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우리끼리 하면 되잖아."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어디 살래? 식장은 또 어쩔 거며.. 너도 아직 자리 못 잡았고, 나도 회사 들어간지 얼마 안 됐으니까.. 좀 더 있다가.."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우리가 사랑하면 되는 거지."
"뭐 결혼을 사랑만으로 해? 우리가 아직 애도 아니고. 이 정도 연애했고 이 정도 살았으면 너도 좀 보이는 게 있을 거 아냐."
"남들 눈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중요해! 뭐 우리만 사는 세상이야? 네가 안 그래도 나 충분히 힘들어. 좀 보채지 좀 마."
갑작스레 짜증을 낸 사내는 미안한지 다시 앉았다. 사내의 눈은 그제야 그녀를 향했다. 그제야 그녀의 눈이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깊고 서글픈 눈의 그녀는 씁쓸한 듯 되뇌었다.
"너는 참 다아시 같아. 오만하고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사람을 봐."
"이 얘긴 그만하자.. 내가 미안해."
".. 그래 그만하자."
사내는 그녀의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걸 깨닫는데 3주나 걸렸다.
다아시.. 다아시.. 그녀가 참 좋아했던 캐릭터였다. 사랑, 사랑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오만과 편견'을 참 좋아했다. 어찌 보면 천진하고 솔직하며 또 어찌 보면 천박하다고 볼 수 있는 여자였다.
그래, 그녀가 참 좋아하던 '오만과 편견' 속 엘리자베스 같았다. 어쩌면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날 오만한 다아시 같다고 말했다. 그래, 엘리자베스. 어째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말로 알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랬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힘주어 키보드를 눌렀다.
'엘리자베스'
몇 년 만일까. 이 화면을 본 사람은 그녀가 떠난 이후로는 내가 처음일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만족감보다는 이제야 그녀를 놓아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텅 빈 바탕화면 '다아시에게'라는 메모장 파일이 공허하게 나를 반겼다.
'나의 다아시. 날 사랑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편견과 오해를 뛰어넘어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해줄래?'
낡은 노트북의 공회전 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채웠다.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후회라면 그저 그 순간 좀 더 뜨겁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후회.
후회와 안도. 복잡한 감정과 함께 노트북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