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층간 소음 방지법
며칠 전, 외출하고 돌아오니 집 문 앞에 작은 쪽지가 붙어 있다. 다 먹고 난 과자 봉지의 부스러기가 새어 나올까, 단정하게 접어서 버릴 것 같은 누군가의 모양새다. 그 사람인가. 어제저녁 남편과 다툰 터라 그가 출근길에 수줍게 붙여둔 사과인가 생각했다. 열어보면 ‘미안해’ 세 글자 혹은 ‘다녀올게’ 네 글자겠거니. 그러나 의외의 시작은 ‘안녕하세요’ 가지런한 궁서체다.
인사로 시작하는 메시지는 아래층으로부터였다. 의자 끄는 소리와 발소리로 인한 층간 소음에 주의해 달라는 것. 성인 둘이 사는 집에 얼마나 소음이 있었을까 하면서도 쪽지를 읽고, 또 읽을수록 듣는 우리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단어 한 글자 허투루 적지 않은 진중함에 숙연해졌다.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으면 이렇게 말을 전했을까. 그럼에도 섬세히 살펴 보낸 메시지를 곱씹어 보기도 전에 욱하는 마음이 앞선 나 자신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먼저 붙여둔 소음방지 패드를 꼼꼼히 살피고 떨어지고 닳아진곳을 보완하고는 나 역시도 미안한 마음을 실어 다음날 몰래 아랫집의 문 앞에 붙여 두었다. 마치 옛 남자 친구의 집 앞에 몰래 선물을 사다 놓고 총총 계단을 내려오던 오래 전의 마음이 스쳤다.
층간 소음은 흔하다. 한국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구가 많으니, 예나 지금이나 층간 소음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웃의 개념이 살아 있던 예전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이제 익명의 사회를 살다 보니 모르는 누군가의 사정이야 이해할 도리가 없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불만을 말하기도 보통 껄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 불편함 때문에 일단은 참게 된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중간자의 역할을 해 주시는 경비아저씨를 통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인터폰으로 연결해 통화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보다 빠르고 정확한 방법을 찾는다.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분노 파워로 단숨에 계단을 올라 초인종을 누르거나 때론 문을 쾅쾅 두드리는 경우도 있다.
15년 전 즈음, 당시의 우리 아랫집이 그랬다. 고향집에는 무척 예민한 아저씨가 살고 계셨는지, 합쳐 보아야 일 년에 사나흘 될까 말까 하는 날, 아직 꼬마이던 사촌동생들이 놀러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하루 종일 ‘뛰지 마, 무서운 아저씨 온다’는협박을 입에 달고 주의를 기울이는데도 늘 역부족이었다. 초인종이 현관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하듯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호흡마저 멈춰야 했다.
특히 기억나는 어느 하루 아랫집의 반응이 좀 심했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내가 문을 열어드렸는데, 아저씨가 다짜고짜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며 따지기 시작했다. 아직 나 역시 학생이었으니, 어른들 계시느냐 물어라도 보셨어야 하지 않았나 싶지만 이유야 어쨌건 미안한 건 사실이니 죄송하다 고개를 숙였다. 소리를 듣고 나온 부모님도 놀러 온 친척들도 미안하다 사과해도 한참을 더 퍼붓고서야 아저씨는 돌아섰다. 숙연해진 분위기에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아랫집 아저씨도 싫었지만, 문을 연 사람인 내가 상황 정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 누군가의 감정 폭탄을 정면으로 맞은 원망도 가득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갔음을 가정하며 일기장에 시나리오를 적어 마음을 다스렸다. 아저씨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없이 적고, 거기에 어떻게 대답했더라면 원만하게 해결이 되었을지 가상의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적어갔다. 상황에 대한 공감으로 시작하는, 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공손하면서도 뼈대는 있고 동시에 아저씨의 화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 고민하던 밤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오늘에서야 나는 그 날의 일기장에 적었던 생각들을 실천해보게 됐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렀던 생각이 세상에 데뷔하게 된 것이다. 사실 생각이라는 것이 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 전까지 타인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않은가. 마치 자세히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알아볼까 말까 하는 희미한 글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를 누군가 앞에 분명히 소리 내어 이야기 함으로써 선명하게 할 때, 그것은 실재가 되어 나의 생각인 동시에 나와 타인이 함께 보고 들을 수 있는 소리와 글자가 된다.
그래서 생각을 말로 옮길 때는 가능한 정확히, 오해 없이, 내 머릿속에 있던 것이 상대의 귀와 눈으로 똑같이 들리고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경쾌한 ‘솔’ 톤으로 말한 것을 ‘미’로 다가가게 해서도, 초록색으로 했던 말을 상대가 빨간 글자로 받아들이게 해서도 안될 말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해석이지만) 15년 전의 아저씨가 하려던 말은 왜 그렇게 사느냐는 핀잔이 아니라 소음 완화의 당부요, 그래서 상대의 생활방식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본인의 일상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전달되기만 해도, 결과는 누군가의 화, 분함, 억울함 등이 아니라 한 때 연애하던 몰캉한 마음을 잠시 떠올릴 만큼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될 수 있다.
느닷없는 감정을 쉽게 싣는 가까운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생각은 미안함이면서 입 밖으로는 성남이, 걱정하는 마음이 실재로는 분노로 표출되는 일이 흔하다. ‘오다 주웠다’도 ‘생각나서 사 왔어’가 되는 암호 같은 표현도 없지는 않지만 그 마법이 빗나가는 때면 빗맞아서 더 아프다. 그리고 가까운 사이에서 생긴 아픔은 다른 아픔보다 다스리고 수습하기 더욱 어렵다. 마음의 층이 다른 상대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려면, 처음부터 상대의 문을 똑똑 두드려야지 쾅쾅 두들겨서는 안 될 말이다. 나중에 변명의 옷을 입고 나올 말을 미리 당겨 해보는 건 어떨까. ‘걱정하는 마음’에 화마저 났다고. 괴로운 마음을 ‘너에게만은’ 털어놓고 싶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