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l Jul 13. 2017

남편에게는 있고 아빠에게는 없는 것

이전에 없었기 때문에 현재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프로그램만 챙겨 보는 선택적 시청자다. 일주일에 하나의 예능, 하나의 드라마면 족하다. 하루 종일 TV를 틀어놓을 일이 없다 보니 광고에 노출도 제한적인데, 얼마 전 눈길이 가는 광고가 하나 생겼다. 유아와 엄마, 아빠의 아침 풍경을 담은 피로회복제 광고로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출근하는 아빠에게 “아빠, 또 놀러 오세요.”라며 인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책상에도, 모니터 바탕화면에도 온통 아이들 사진이면서 일이 많을 때나 아닐 때나 좀처럼 퇴근하지 않던 옛 직장상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녁을 먹을 시간 즈음, 수화기 너머에서 ‘아빠 언제와?’ 아이들의 초고주파 맑은 음성이 들리고, 핸드폰 마이크에 두 손을 모으고 소리를 낮추어 ‘응, 금방 갈게.’ 하던 아빠들의 모습은 아련하기도, 측은하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동아제약 / 나를 아끼자, 2017년 박카스 두 번째 이야기



나도 누군가의 딸이며 언젠가는 상사들의 딸들처럼 영롱한 목소리로 ‘엄마, 아빠 언제와?’ 하던 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 기억에는 없다. 그저 아빠는 가족이긴 하지만 집에는 좀처럼 없는 사람으로, 둘만 함께 있으면 어색하기 그지없는 사이가 됐다. 굳이 무슨 사건이 없어도 엄마와는 하루 종일 쫑알쫑알 떠들지만 아빠와는 전화든 대화든 용건만 간단히, 우리 둘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단답형의 질문과 답이 오가는 게 전부다. 광고 속 세 살배기 아이가 아빠에게 느꼈을 조금 친한 낯선 사람 같은 감정은 서른셋의 내게도 비슷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참 - 멀다


이제는 그나마 이런 광고를 접한 아빠들이 경각심이나마 가지겠지만 내가 어리던 때만 해도 육아와 가사는 엄마의 전유물이며 아빠들은 그저 바깥일을 잘 하면 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아이는 아이, 사회 분위기 따라 이해하고 노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그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아빠라는 존재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자라면서 아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자라나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감정적인 거리란 이성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무언가 함께 했던 것이 참- 없다. 그래서 우리는 참- 멀다.


결혼을 앞둔 언젠가, 아빠는 친척들과 모여 작고 어리던 내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시간은 참 빠르다는 이야길 나누셨다. ‘밤에 잠을 안 자고 울어대 커다란 베개 위에 아기인 나를 눕혀 엄마와 함께 밀었다 당겼다 이리저리 흔들했다’ 거나 ‘동네에 나갈 때면 자전거 바구니에 나를 태우고 다녔다’는 것이 엊그제 같다는 것이다. 자박자박 걸어 다니던 내가 부글부글 끓던 전기밥솥 코드에 걸려 넘어져 전신 화상을 입은 이야기까지 총 세 가지 이야기가 단골 소재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다섯 살 사이, 그래서 나는 기억할 수 없는 때의 이야기에서 아빠는 나와 함께지만 나의 기억에서 아빠와의 추억은 좀처럼 없다. 숙제도 공부도 엄마가 살펴 주었고, 어딘가 놀러 가도 엄마와 나와 동생 셋이었다. 특별히 선물을 받아본 적도, 쇼핑을 함께한 적도, 운동이나 만들기를 같이 한 적도 거의 없다. 


그러고 보니 어린 날,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던 특별한 기억도 없다. 너무 일상적이라 기억이 무뎌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늘 함께 였다 확신도 어렵다. 아빠의 업무 스케줄은 학생인 나의 시계와는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단지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이해하게 됐다고 해서 갑자기 어느 한순간 아빠와 절친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쩌다 둘만 집에 있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아빠는 큰방에서 TV를 보다가 때가 되면 상을 차려 “아빠 밥 먹어.” “응.” 정도일 뿐 달리 나누는 이야기가 없다. 직장 상사와의 식사보다도 더욱 식사에 집중한다. 다정한 아빠와 딸의 일상 이야기 같은 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것 같다.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하여 내가 아빠를 남처럼 생각한다거나 원망한다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린 시간이 없었고, 친하지 않을 뿐.




아빠는 가끔 내게 푸념했다. 남의 집 딸들은 애교도 많고 용돈을 달라 조르기도 한다는데 우리 집 딸내미는 목석같기 그지없다며 말이다. 그러나 애초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애초에 아빠와 그리 보드라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 애교보다는 정당하게 요구하고 감사할 것이며, 필요 이상의 요구는 애초에 욕구해본 적도 없는 강직한 자녀였다. 어찌나 강직하였는지, 다퉈도 언제나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은 내가 아니라 아빠였다. (사실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논리적으로 바른말을 하는 쪽은 언제나 자녀다.) 부녀지간이니 싸워도 그러려니 지나가면 괜찮아졌다. 그리고 친하던 그렇지 않던 부녀지간인 우리에게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크고 작은 일로 다투는 날이면 나는 아빠에게 그랬듯 강직한 아내가 됐다. 언성을 높여 말하면 괜히 기분 나빠하는 말처럼 들릴까 싶어 국어책 읽듯 감정을 배제하고 말하기 일쑤였다. 언뜻 들으면 좋은 방법인 것 같지만 아니다.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지며, 한쪽이 차분한 투로 이야기했을 때 상대는 마치 내가 본인을 아이 다루듯 타이르는 듯 느껴져 무시당하는 듯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을 남편의 존재로 인해 알게 됐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아빠에게 필요했던 것과 같은 것, 즉 보드라움 이란다. 주장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대/체/ /왜/ 그러는 거야!”가 턱 밑까지 차오르는 걸 겨우 참아내고 영어의 ‘shall we’ 화법으로, 즉 ‘당신’ 대신에 ‘우리’라고, ‘~해!’의 명령이 아닌 권유의 표현 ‘하자’ 혹은 ‘해보자’, 가끔씩은 ‘해볼까?’로 동그랗고 예쁘게 말한 것을 어찌 더 보드랍게 표현하라는 것인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원인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지 실체는 알 수 없는 그 ‘보드라움’이 결여된 나의 성격이 좋을 때는 그럭저럭 지나가도 나쁠 때는 도드라져 보이는 거다. 이는 내가 나쁘거나 잘못했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성격 차이이자 관점의 차이다. 거짓말을 못하는 눈은 레이저를 쏘는데도 말은 권유형으로 표현했으니 나는 정당한 노력을 했다 생각했지만, 부녀와 부부 사이에서는 타당하지 않은 감정도 때로는 살피는 것이 먼저일 수 있다. 말이 쉽지, 매사 정당성을 먼저 생각하는 성격이 어딜 가진 않는다. ‘왠지’, ‘나도 모르게’, ‘괜히’ 생길 수 있는 것이 감정의 영역이니 쉽게 관찰할 수도 설명을 들을 수도 없는 그 모호한 영역을 어찌 다루어야 할지 막막하다. 우리 아빠, 우리 남편.. 나에겐‘우리’로 존재하는 이 두 남자들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




남편에게는 있고 아빠에게는 없는 것


사소하지만, 나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잊힌 그때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좋은 날은 잊히고 그 자리는 갈등으로 덮여 마치 호시절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여겨지지만, 추억을 꺼내 품어보면 나의 마음이 보드라워지지 않을 수가 없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남편이 전적으로 유리했다. 연애의 말랑말랑한 기억은 떠올리기 쉬운데, 심지어는 비교적 최근의 사건이니 더욱 빨리 생각났다. 심지어 함께 살고 있으니 앞으로 좋은 시간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빠는… 아니었다. 떠오르는 특별한 기억이 없고, 그나마 떠오르는 것도 ‘아빠가 어느 날 학교에 나를 데리러 왔었다.’와 같은 단순한 문장이다. 애초에는 남인 남편과 달리 아빠는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늘 그 자리를 지킬 당연한 존재기 때문에 사소한 일상들이 기억에 남아있기 어려운 데다 함께 인상 깊은 시간조차도 많이 나누질 못했다. 이제는 더 이상 함께 살지 않으니 새로운 즐거움을 쌓고자 하더라도 어렵다. 시간이 없었고,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연장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인과관계는 너무 잔인하다.


아빠와 나의 시간이란 정말 애초에 없었던 것일까, 어딘가에 꽁꽁 숨어 찾기 어려운 걸까. 나는 일단 후자를 믿어본다. 사이가 서먹하긴 하지만, 그래도 광고 속의 어린 딸은 아빠에게 또 놀러 오라 하지 않던가, 또. 나의 마음속 어딘가도 ‘또’가, 또 경험하고 싶은 즐거움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홀로 가만히 되짚어보고 때로는 서로의 기억 조각을 맞추며 생각해보려 한다. 남편과 잘 지내려 노력할수록, 그만한 노력을 다하지 않았기에 커지던 아빠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원동력으로, 나는 아빠와의 시간에 다시 공기를 불어넣어 수면 위로 떠올려보련다. 그것이 그간 마음속에 솟아 있던 빙산들을 보드랍게 덮을 것인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시간이 있었다면, 앞으로도 법정 같은 ‘네, 아니오’ 대신 한두 마디 더 이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