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지구를 떠나야 한다면 무슨 그릇을 가져가지?
아침 7시, 알람이 울린다. 오른쪽은 납작하게 눌리고 왼쪽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머리카락은 지난밤 내가 어느 방향을 돌아 누워 잤는지를 생생하게 알려준다. 아직 온기가 남은 이불 안에 팔다리를 다시 뻗어 넣으며 이불이 나를 쓰다듬기라도 하는 듯 보드라운 여유를 온몸으로 느낀다. 그렇게 5분쯤, 이부자리와의 로맨스를 마치면 장르를 바꿔야 한다. 힘찬 기지개와 함께 벌떡 일어나 앞으로, 앞으로.
매일 아침 식단은 비슷하다. 사과와 제철과일, 반숙으로 조리한 달걀프라이, 견과류를 듬뿍 넣은 그레놀라와 우유, 그리고 커피. 아침식사는 건강한 생활의 핵심이므로 탄수화물과 단백질, 비타민과 무기질의 균형 있는 식단을 준비한다. 동원되는 그릇도 다양하다.프룻볼과 시리얼 볼, 작은 접시와 커다란 머그잔인데 서너 개씩 돌려 쓰며 그 날 그 날 분위기를 바꾼다.
어느 날 아침은 전날 밤의 유성우 소식이 뉴스와 함께였다. 혜성과 우주에 떠다니던 먼지들이 대거 지구로 빨려 드는 것, 밤에도 조명이 가득한 도시에서는 육안으로 관찰하기 어렵지만, 화면에 나오는 영상을 보는 일은 무척 신비롭다. 하나의 불꽃으로 지구의 하늘을 수놓고 결국 재가 되어 사라지는 그들. 이토록 아름답지만 중력에 빨려 드는 것의 크기가 클수록 함께 이 지구에 자신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질 무언가를 찾게 마련이다. 블록버스터 영화에도 종종 등장하는 이야기, 혜성과 충돌해 지구가 멸망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소수만이 또 다른 살 곳을 찾아 우주선에 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유성우의 영상을 보다 문득 마음속에 물음표가 생겼다. 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지구를 떠나야 한다면 나는 이 중에 무슨 그릇을 가져가야 하지?
진정 그러한 상황이라면 나의 답은 볼(bowl)이다. 이 때는 무조건 쓰임이 다양해야 할 텐데, 오목한 그릇을 뜻하는 단어인 볼은 사발, 대접, 공기 등등 우리말로는 그 용도에 따라 서로 다른 단어로 불리지만 영어로는 일관되게 볼이다. 과일을 담는프룻볼, 국물을 담는 스프볼, 화채용인 펀치볼, 샐러드볼, 시리얼 볼 등 그 앞에 담는 대상이나 용도를 덧붙일 뿐이다.
납작하고 평평한 접시와는 달리 볼은 내용물을 품어내는 특징을 가진다. 빗물을 받아 물을 마실 수 있고 남은 식량을 담아 저장할 수 있으며 때로는 물이든 흙이 든 무언가를 퍼담거나 퍼내는 도구로 활용할 수도 있으니 이만큼 다용도로 쓸 수 있는 그릇은 없다. 문명이 발달하며 크기를 조절하고 때로는 손잡이를 달기도 하며 컵과 사발과 대접과 공기의 여러 형태를 만들었지만, 고대 인류가 만든 그릇의 기본 형태 역시 볼이었다. 흙으로 그릇을 빚어 만들기 시작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도 그렇지 않은가. 물론 가져간 볼이 때론 너무 뾰족하거나 납작해서, 손잡이가 없어서, 크기가 너무 크거나 작아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어쨌든이 모든 용도로 쓸 수 있는 것은 컵도 접시도 아닌 볼이다.
그러고 보면 볼(bowl)은 사람과 가장 닮은 그릇이 아닌가 싶다. 평생 보고 듣고 느끼고 익힌 것을 담아냈다 덜어내기를 반복하며 이런저런 역할을 한다. OO엄마/아빠, OO딸/아들, OO아내/남편, OO선배/후배, OO 직원/손님, OO이웃 등. 그리고 또 하나, 하는 일은 많은 것 같은데 꼭 아쉬움이 남는다. 여전히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고, 하고 난 일들도 성에 차지 않고, 하지 못한 일들이 마음에 걸린다. 이런 때는 조용히 앉아 나의 역할들을 찬찬히 쭉 써 내려가 보았으면 한다. 열, 스물, 서른, 생각할수록 리스트는 점점 길어질 것이다. 잊지 말자. 볼(bowl)의 매력은 그것이 가진 다양한 쓰임새다. 그 누구도 혼자서 그리 많은 역할을 해낼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람의 매력도 그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