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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리어 아티스트 Apr 20. 2024

쭈글쭈글한 좌절의 순간들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날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지.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어젠 굉장히 중요한 미팅이 있었고, 내가 발표를 맡았다. 미팅이 끝나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부여잡고, 오랜만에 화장실의 맨 끝칸을 찾아갔다. 화장실 맨 끝칸은 사회생활 초창기 때 좌절의 순간이 올 때마다 자주 찾던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다. 경력이 훨씬 많이 쌓인 지금도, 마치 신입사원 시절처럼, 멘탈이 가루가 되는 순간을 여전히 마주한다.  

 

새로운 업계로 이직을 한 이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일이 굉장히 많아졌다. 사실 무대 위에서 발표하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일은 매 순간이 새롭고, 다른 종류의 긴장이 몰려온다. 주목받는 것보다는 조용히 있는 것을 선호하는 극 I 성향인 나에겐 발표란, 내가 아닌 다른 면을 애써서 끌어내야 하는 도전이자 노력이기 때문이다. 


침은 바짝바짝 마르고 분명 말을 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마이크를 잡고 있는 손이 티가 날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목소리의 떨림이 심해지는 증상. 발표를 잘하기 위해서 수많은 연습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무리 자주 경험해도 무대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발표를 그렇게 많이 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자리라는 압박감,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게다가 발표내용은 다른 부서 동료들의 노력까지 함께 들어갔고 그동안 많은 공을 들인 내용이었다. 그 전날 새벽까지 자료 준비를 하고 팀원들과 여러 번 리허설도 했는데, 막상 발표를 시작한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심한 긴장감으로 인해 목소리가 점점 떨려왔다.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더더욱 긴장감이 심해져서 말을 이어가기가 도저히 어려울 정도였다.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겨우 발표를 끝내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본 동료의 첫마디는 "괜찮아? 몸이 안 좋아 보여."였다. 

그동안 오늘 미팅의 순간을 위해 동료 역시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에, 미안함이 몰려왔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던 역량이 훨씬 크고 많은데, 나의 형편없는 긴장감으로 인해, 망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초라함과 좌절감을 갖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퇴근을 했다. 분명 이대로 집에 가면 요리를 할 기운이 없을 것을 알았기에, 그냥 밖에서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 근처 한식당에 들렀다. 


허전한 마음이 들 때는 한식이 유난히 그립다. 나의 소울푸드인 김치찌개를 주문하고 혼자 밥을 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그렇게 긴장을 심하게 했을까, 평소 실력대로만 했어도 중간은 갔을 텐데, 돌이켜보니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굉장히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압박감과 책임감을 너무 무겁게 갖고 있다 보니 긴장이 더 심해졌던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로 했다.


1. 발표하기 전에 내용에 대해 조금 더 연구하고 공부하기

2. 사전에 발표 연습을 녹화해서 모니터링해보기

3. 마치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엄마처럼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또박또박 말하기


비록 흑역사로 남을 만큼 아쉬웠던 발표였지만 이 경험을 통해 앞으로 개선할 내용들을 적어보니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못했지만 다음에 조금 더 잘하면 된다. 일을 하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라고 툴툴 털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토닥이면서 말이다. 다음에도 역시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지금보다 1% 더 나아지면 충분하니까 너무 나를 괴롭히지 말아야겠다. 어차피 나에게 있어서 커리어에서 달성하고 싶은 목표는 "완벽한 성공"보다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성장"이니까. 김치찌게랑 밥 한공기를 다 비우고, 다시 한번 나에게 말을 걸어본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는거지. 그래도 오늘 어려운 발표 하느라 고생 많았다 나.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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