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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여름 앞에서

달려온 시간의 끝에서 마주한 진심

by 커리어 아티스트

지난 2년간 한 회사를 위해, 아니 어쩌면 내 커리어를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던지며 일해왔다. 말 그대로 온몸을 불살랐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치열했고, 그만큼 몰입했고, 그만큼 무리했다. 그런데 최근, 그토록 사랑했고, 의미 있었던 그 일터에 사직서를 내밀었다. 겉으로 보기엔 이직이나 휴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이 결정은 삶의 방향을 다시 잡는, 조용하지만 본질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동안 나는 커리어라는 단어 속에 나 자신을 밀어넣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여정이었고, 누군가가 깔아둔 길은커녕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헤매다시피 걸었다. 그 과정은 고되고 외로웠지만, 뿌듯함도 있었다. 결과가 따랐고, 변화가 있었고, 성취감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힘이 들 때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다짐을 반복했다. “조금만 더.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돼.”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끝도 보이지 않는 마라톤을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선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끝에,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내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마치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력감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짓눌렀고, 몸은 더 이상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건강검진을 위해 겨우 시간을 내 병원을 찾았고, 그 자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했다. 결과지를 들고 조용히 앉아 있던 그날, 나는 오랜만에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다고, 아직 버틸 수 있다고 말해왔던 지난 날의 나에게, 그제서야 솔직해질 수 있었다.


출장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캐리어를 끌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아이들은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엄마가 집에 없다는 사실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었고, 출장을 간다고 말해도 “Ok, bye mommy”라는 짧은 인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반응이 나를 더 깊이 아프게 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출장을 가지 않더라도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내 아이들이 엄마 없는 일상에 익숙해지는 동안, 나는 무얼 지키고 있었던 걸까. 이 질문들은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마음이 자꾸만 약해졌다. 아무리 성취를 거두어도 공허했고, 매사에 의욕이 나질 않았다. 머리로는 아직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몸과 마음은 더 이상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그런 나 자신을 향해 “아직 부족하다”며 몰아세우는 내 내면의 목소리였다. 자책과 후회의 경계에서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사실 예전에는 이런 고민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고물가의 도시 싱가포르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행복’을 논한다는 건 어쩌면 현실감 없는 이상주의자의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존이 우선인데, 그 위에 감정과 여유를 얹는 건 남의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결국 내가 나를 무시하는 방식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서 일을 시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성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함께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실 도피는 아닐까,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을 허무하게 만드는 결정은 아닐까, 매일 밤 나 자신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선택했다. 가장 중요한 가치 앞에서, 잠시 멈추기로 말이다. 감사하게도 다른 곳으로부터 좋은 제안도 받았지만 일단 선택은 잠시 미뤄두었다. 당장은 단 1~2개월만이라도, 아이들의 엄마로, 그리고 나 자신을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기 때문이다.


분명 앞으로 다시 달릴 날이 오겠지만, 그전에 나는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무너졌던 건강을 회복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쳤던 일상의 순간들을 다시 마주하며,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조용히 덜어내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무엇을 더 하겠다는 결심보다는, 이제는 무엇을 덜어낼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때로는 ‘잠시 멈춰 서는 용기’가 우리를 더 멀리 데려다줄 수 있다. 지금의 이 조용한 멈춤이, 더 단단한 다음 걸음을 위한 준비가 되기를 바라며, 이 여름을 조용히 보내려고 한다. 내가 선택한 이 고요한 여름이, 삶을 되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그리고 그 끝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 갈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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