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불편함 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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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천 지역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운전을 꽤 잘하게 됐다. 하루에 100km, 서너 시간쯤 운전했을 테니 운송업계 종사자 다음으로 '핸들밥' 좀 먹은 셈이다. 조수석 태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소매춤에 숨겨 둔 '운전석 필살기'도 두어 개쯤 있었다. 그중 하나는 '한 방에 주차하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단 한 번의 손목 스냅으로 핸들 돌려서 한 방에 주차하기'가 있었다. 이 것이 나란 운전자의 숙련도였다.
그리고 테슬라가 나왔다.
약은 약사에게, 운전은 테슬라에게. 필살기를 모두 잃었다. 미래에서 온 자동차에 몸을 맡기고 저 멀리 뻗은 아스팔트의 끝을 바라봤다. 입 안에서 달콤쌉싸름한 맛이 났다.
2. 시나이 반도 유목민족인 배두인 동네에 살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배두인 아이들이었다. 출산율 0.65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출산율 2.9 인 나라에 가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애들이 발에 차인다.
아이들은 신기하게 생긴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맨질맨질한 돌 두 개를 노끈으로 묶어 빙빙 돌리며 '딱딱딱'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돌팔매질을 하려는 건가? 그게 장난감이라는 걸 깨닫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한눈에 봐도 장난감인 것들도 있었다. 작은 생수병을 우유갑으로 감싸고, 병뚜껑을 붙여 바퀴를 삼은 다음, 노끈을 병 주둥이에 묶어 끌고 다니는, 장난감 자동차였다. 움직일 때 바퀴가 굴러가진 않았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3. 1932년에 나온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에는
'소마'라는 멋진 약이 등장한다. 소마를 먹으면 오직 행복해진다. "마음이 내킬 때는 언제나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으며 돌아올 때에도 골치 아프거나 신화에 사로잡히지도 않는 약"이다. 영화 메트릭스에 나오는 '파란 약' 보다 훨씬 멋지다. 거긴 쌈박질하잖아 멋진 신세계에는 오직 행복만이 허락된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는 배급제였다. 그러나 우리 손 안의 도파민 배급기는 무한하다. 손짓 한 번이면 몇 번이고 도파민 사워를 즐길 수 있다. 구세계에서는 맘모스 10마리쯤 때려잡아야 맛볼 수 있는 짜릿함이었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장난감은 우리의 상상력을 요구해 왔다. 형태도 단순했다. 알맞은 크기의 공깃돌, 명절날 삼촌이 나무를 깎아 만들어 준 윷 정도? 최강도파민 쥐불놀이
베두인 동네에서 내 휴대폰의 주요 기능은 '후라씨' 였다. 가로등이 몇 개 없었다. 해가 지면 시커먼 어둠 너머로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쟤네는 앞이 보이는 건가? 초딩때부터 안경잽이였던 나는 후라씨를 꼭 부여잡고 주춤거릴 뿐이었다.
그 아이들은 나의 후라씨가 멋진 신세계로 가는 열쇠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마 알았을 것이다.
4. 강산이 변하기 전부터 장래희망이 한량이었던 나는
"인간 노동의 시장 가치가 0으로 수렴하고 있다"며 기뻐해왔다. 전 인류가 백수가 된다니! 신세계는 역시 멋져! 다 같이 놀고먹을 그날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챗지피티가 나왔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GPT-4 가 나왔다. 챗지피티(3.5)가 중학생 인턴 100명이면 지피티 4는 대학생 인턴 100명이라고 한다. 한 달에 3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대학생 인턴을 100명이나 쓸 수 있다니,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건 일단 부려먹고 볼 일이다.
그런데 가만. 나는 올해로 7년 차. 명함도 없는 기술 스타트업 잡부인데. 내밀 명함이 없다 중딩이 몇 달 만에 대딩이 되었으면, 대딩이 7년 차가 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5. 강산이 변하기 전부터 나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요즘 나는 업무 별로 맞춤형 지피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지피티와 같이 일하다 보면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종종 헷갈린다. 나는 프롬프트 엔지니어 인가? 지피티가 이 일을 온전히 혼자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이래라저래라 피드백을 주는 선생님인가? 미운정 고운정까지 들어버려 지피티 킬러들이 나왔대도 구독을 이어간다. 가르쳐 놓은 게 아까워서
AI 팀원들과 일을 하다 보니 문득, 내가 창업을 하더라도 아무도 동고동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왜인지 마음이 허전했다. 나에게 창업이란 루피의 원피스 같은 것이었나 보다.
6. 청출어람은 스승의 가장 큰 기쁨이라는데
지피티들이 나를 넘어서는 때는 언제일까? 다음 달 그때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아마도 실패가 두려워 나는 창업을 미뤄두고 있었다. 그때를 대비해 연마해 둔 필살기도 몇 개 있었는데 말이다. AI 시대에 사업을 한다는 건 내가 꿈꾸던 항해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필살기를 모두 잃었다.
7. 고통을 최소화하고 불편함을 제거하면
멋진 신세계가 열릴까? 언제부턴가 불편함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편한 방법들이 더 싸고 편하니까.
생각나는 대로 적다 보니 글을 마무리짓기가 어려워 지피티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 글을 던져줬더니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의미를 어떻게 찾아가는 가에 대한 글"이라며 수능 언어영역 강사처럼 군다. 정작 결론부 아이디어는 뻔한 것들만 던져준다. 아직까지는 인간의 글로 출판해도 되겠다.
언젠가 지피티가 내 글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결론을 달아주는 날, 하산하는 것은 스승일까 제자일까?
쿠키 문장: '고된 노동으로부터 인류가 해방되면, 우린 뭘 하면 되지? 인간 자아는 무엇으로 구성될까?'라고 지피티에게 물었더니 글쓰기 같은 창의적인 활동을 해보란다.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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