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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Dec 19. 2020

절망스러운 육아, 아니 자녀교육.

아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절망적 심란함.

나의 아들은 심성이 착하다. 잘 생겼고 건강하며 선한 마음을 가졌다. 예전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난 아버지와 닮기 싫어 자녀를 갖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손 잡고 공 한 번 찬 기억이 없는 나는, 언제나 집안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화장실 갈 때조차 방문을 열면 거실에 있을 아버지가 두려웠던 나는 형처럼 맞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며 자랐고 덕분에 아버지에게 맞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폭력적이거나 나쁜 아버지는 분명 아니었다. 그저 전혀 가깝지 않은 존재였고 거의 모든 면에서 공감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자수성가의 표본 중 하나라고 해도 될 법한 아버지의 성에 꽉 차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낙제는 아니어서 형처럼 아버지가 부끄러워하는 아들은 아니었다. 난 스스로 내 앞가림을 하며 나대로 많은 경험을 하며 스스로 길을 찾았다.


결혼 후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이들을 키우며 지내왔고 좋은 아빠는 아니어도 최악의 아버지는 안 되려 노력했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크게 느끼지 못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점점 커가는, 나와 똑같이 생긴 아들을 보며 가끔 나랑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했지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거지, 아들은 아들이지 내가 아니잖아.' 라며 이해해왔고 그게 당연하다 여겼다.


하지만.


이제 중학생이 되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 누나와 비교해도 지나친 엄살과 순간순간만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젠 똑바로 내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점점 버거워지고 있다. 하루하루를 그냥 덜 지루하게, 조금이라도 재미만 있으면 그것이면 된다는 식으로 시간을 변기 물 내리듯 흘려보내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감을 느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일은 잊고, 똑같은 일을 반복해도 배우는 게 없다. 잘못이나 실수에서 배우는 것이 전무하다. 반성도 없고 후회도 없다. 스스로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기준이 낮다. 듣지 않으며 읽지 않는다. 모르는 건 넘어가고 알려하지 않는다. 일체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려 하거나, 못하는 걸 연습해서 만회하려 하지 않는다.


기준은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가졌던 기준보다 낮음은 물론이고, 나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며 그저 중간 정도 혹은 못하지만 않아도 되니 필요할 때, 해야 할 때 노력하는 모습, 그런 능력만 가지면 된다고 하는데도 이마저도 안 되는 아들을 보고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


아들에게 나의 기대나 바람을 투영하면 안 되는 것쯤은 안다. 그러지 않고 있다. 나는 다만 그저 아들이 인생에는 노력이라는 게 때로 필요하며,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결과는 어쩔 수 없으니 과정만큼은 집중해주길 원할 뿐이다. 나는 집중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나의 스킬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능력이다. 집중해서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방법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지 누구나 때가 되면 할 수 있는 무슨 본능이 아니다.


나와 아내의 착각은 아이들이 경쟁에서 자유롭고 불필요한 사교육 열풍에서 벗어나며 스트레스 없이 자라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윤리나 도덕도 결국 교육으로 생기는 것이었다. 부모는 부모이지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고 배운다는 말은 최소한 반 이상은 거짓이다. 아이들은 절대로 보고 배우지 않는다. 내 아이들이 증거다. 부모가 전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을 한다. 아무도 가지지 않은 습관을 첫째도 둘째도 갖고 있는데 고치지 않는다. 아무리 모범을 보여도 소용이 없다.


아이들은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그 상대로부터 배우고 영향을 받고 동기를, 자아발전의 계기를 찾게 된다. 이곳에서는 그 관계 맺음의 대상의 수가 현저히 적어 부모가 다양한 역할을 해야만 하는데 그게 아이들에게 유효하지 않다. 아내와 나는 갖은 수를 써가며 선생님도 되고 친구도 되고 하고 있지만 이제 사춘기인 아이들에겐 부모 입에서 나오는 건 좋든 싫든 일종의 잔소리일 뿐이며, 매일 잘난 척하는 것이고, 옛날 얘기, 공감가지 않는 이야기일 뿐인 것 같다. 선생님이 줄 수 있는 자극이 있고, 같은 반 친구가 주는 자극이 있으며, 좋아하는 대상이나 나를 좋아하는 친구로부터 느끼는 감정과 계기 같은 게 있는데 여기선 그런 대상이 너무 적고 그나마 있는 그들도 내가 아는 그들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내와 나의 기준이 너무 높다며 이미 바닥까지 내려놓은 기준을 아예 버리라고 말한다. 반에서 중간을 하는데 왜 자꾸 나무라느냐는 식이다. 여기서 중간이면 넓은 세계에서 보면 중간 이하라고 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직접 경험하지 못했고 그저 부모의 말일뿐이니까 와 닿지 않는 것이다.


못해도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유아기에, 아동들에게는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춘기 아이들에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처럼 경쟁으로 몰아가는 것도 답은 아니지만 뭘 해도 그냥 넌 잘할 거라며 밑도 끝도 없는 긍정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방임이고 무책임이며 무관심이다. 아이들은 하향 평준화될 뿐이다. 질 낮은 교육이 아이들의 지적 수준의 기준을 더 낮춘다. 국적이 제각각인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며, 교육 수준도 상식도 언어도 제각각인 학부모들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니 그저 막무가내식의 칭찬과 격려만을 하며 무책임하게 교육한다. 1학년 아이를 대하는 교사와 6학년 학생을 대하는 교사가 같은 태도를 취한다. 영어 원어민인 교사가 틀린 영어 문장도 수정해주지 않으니 아이들은 자기들이 이상한 영어를 쓴다고 지적하는 부모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 증거를 들이대면 인정은 하지만, 선생님도 안 하는 지적을 부모가 하니 아이들이 이 답답한 부모의 마음과 걱정은 듣기 싫은 소리일 뿐이다.


나도 안다. 아이들 교육에 답은 없을 것이다. 모든 건 상대적인 것이다. 아이들의 성향과 부모의 성향, 그리고 교육의 질과 양, 그리고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난 올해 - 사회적으로 이젠 학대 수준으로 취급하는 - 체벌을 많이 했다. 고백하건데 나는 체벌이 학대니 뭐니 하는 말에 반대한다. 체벌이 아이들을 망친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칭찬이 아이를 춤추게 한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반대도 믿지 않는다. 체벌, 칭찬, 격려 같은 단어들의 의미는 단순하지만 그 영향은 일방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 어떤 환경의 어떤 아이에게 어떤 부모나 교사가 어떻게 하느냐는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다. 체벌이 학대이고 부정적인 것만 존재하면 손흥민은 지금의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것이고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법이 뭐라고 하든 이것이 진리다. 어떤 아이는 격려와 칭찬에 자극받고, 어떤 아이는 비판과 상대적인 비교 속에서 자기 자리를 인지하며 발전한다. 어떤 아이는 칭찬에 교만해지는 반면 어떤 아이는 칭찬을 양분 삼아 나아간다. 어떤 아이는 때리고 혼을 내면 규율에 민감해지고, 어떤 아이는 반발하는데, 어떤 아이는 순종하고, 어떤 아이는 체벌의 효과에 의문을 갖는다. 같은 방법이 모든 아이들에게 같은 효과를 지 않는다. 체벌 역시 단순하지만 체벌이 주는 영향은 대상에 따라 매우 복잡하게 나타난다.


모든 것은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지 단순하게 정답이 이것이고 저것은 틀렸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니, 하지만 지금 나는 과거의 생각도 틀렸으며 올해의 내 교육 방법도 우리의 관계에서 볼 때는 틀렸다는 것을 인지했고, 마침내 완전히 길을 잃었다.


답이 그렇게 단순히 칭찬과 격려와 관심이라면 이미 성공했어야 하고, 나에게 체벌이 주었던 효과를 아이도 똑같이 받았다면 올해 우리 아이들은 달라졌어야 한다. 하지만 다 틀렸다. 효과는 제로에 가깝다. 우리 아이들에게 맞는 답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고 나는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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