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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Mar 30. 2021

타임푸어거나 진짜 푸어거나.

워라밸, 자본주의 사회 트렌드 세터들의 말장난.

수 년 전부터 소위 워라밸이 사회적 키워드가 되고, 평범한 이들은 어떻게 해도 근로소득으로는 집을 구입할 수 없게 되면서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보다는 현재를 즐기기 시작한 것 같다. 매년 3~5% 성장하던 시대, 연봉과 임금도 연공서열에 따라 매년 꾸준히 오르던 시대를 구식이라며 직무와 직능, 역할에 따라 급여를 책정하고 성과를 따지니 매년 그냥 자연히 오르던 연봉은 이제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과 성과 측정에 대한 불안과 불신으로 뒤덮여 '월급=행복' 공식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가만히 보면 지금 우리사회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물질주의로 가는 중인데 그 안에서 나오는 신기술이나 새로운 플랫폼들은 모두 자본주의 안에서 더 극단적인 기업의 이익추구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그걸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결국 일부 소수와 일부 기업만이 모든 걸 독식하는 추세에 기름을 붓는 행위이지 무슨 현명한 소비나 새로운 트렌드를 즐기는 쿨한 소비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안드로메다만큼 멀다. 편리함 추구는 경제적 위치 기준 상위10% 이하에겐 그저 독이다.)


그 와중에 워라밸을 추구한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위 10~20%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실 상위 10% 이내의 사람들은 워라밸을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이들이다. 이미 그 이전부터 밸런스가 잡혀 있거나 밸런스에 무관하게 시간을 스스로 안배할 수 있는 여건의 사람들이며, 근로소득에 의존하지 않는 이들이다. 하위 80%는 워라밸을 추구하면 사실 미래가 지나치게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인정하거나 말거나 현실이 그렇다.


그들은 근로소득이 주소득원이기에 워라밸을 추구하면 일부 금수저를 제외하고는 딱히 워라밸과 자산증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투기를 하거나 비리에 연루되는 방법 뿐이다. 우리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잣대'에 근거하여 수용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 현실을 보고 있다.


비리와 부정이라니 남 얘기 같겠지만,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조직 뒤에 숨어 자기는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라는 하나은행 직원들,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친인척과 지인을 동원해 투기하는 LH직원들과 각종 개발 관련 직무를 수행하는 공무원들, 병원에서 불법 시술을 하는 이들... 이들은 재벌도 아니고 흉악범도 아닌 평범한 이웃들이다. 내 친구이고 친구의 형제자매, 배우자들이다. 아닌 것 같다면 환상에서 깰 필요가 있다. 그들은 특별히 나쁜 놈들이 아니다. 다들 그렇게 자기 자리에서 가능한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도모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예를 들어, 김상조 정책실장처럼 재벌의 불공정을 비판하고 경제 정의를 실천한다고 하던 이가 임대차보호법에 따른 인상률 5%를 실행하기 이틀 전에 3배 가까이 올리고 사적 이익을 취하는 모습은 이건 그냥 걸리거나 걸리지 않거나의 문제이지 누구나 사적 이익 앞에서는 거의 비슷한 수준의 도덕성을 가졌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고위공무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은 나의 사적이익에는 결코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벌저격수이자 무려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몸소 보여주었다. 언제나 그랬듯 아주 적은 예외가 있을 뿐,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내로남불 수준일 뿐이라는 자조섞인 생각이 든다.


무튼, 이런 게 현실이라 근로소득에 기반을 둔 이들이 워라밸을 추구하며 건전하게 자산증식을 도모할 기회 -부동산 가치 폭등에 준하는 속도로 추구할 기회-는 없다, 아니 최소한 곧 사라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도생하여 타임푸어가 되지 않기 위해 워라밸을 추구하려면 투자 뿐인데 투자 역시 종잣돈과 시간을 요구한다. 시간, 시간을 투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효과적인 투자를 위해 여가를 희생하면 가능할 수 있다. 이 역시 결국 시간을 볼모로 내주어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쉽게 타임푸어가 되기 싫다, 워라밸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워라밸을 실현할 수 없는 타임푸어이거나, 아니면 애초에 이미 그런 위치를 물려받은 사람인데 그게 무슨 꽤 괜찮은 가치관 같으니 입에 붙인 사람, '나 개념있는 사람이지?'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 뿐이다.


다른 예로 쉽게 말해, 무언가를 '싸게 사기 위해' 발품을 판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미 푸어이거나 타임푸어가 되길 자초하는 사람이다. 실제 본인의 시간이 시간당 최저임금보다 싸거나, 반대로 비싼데도 싸게 소모해버리는 경제관념이 부족하고 현명치 못한 사람들이다. 본인의 시간당 임금이 평균적으로 시간을 써서 노동하는 사람들(즉, 최저임금)보다 월등히 비싸면 귀한 시간을 소모하는 발품파는 행위는 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80만원짜리를 88만원에 사도 편리하고 빠르게 쾌적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여길 수 있어야 한다. 8만원을 싸게 사려고 온오프라인을 알아보는데 2시간을 더 소비한다면 이미 2시간이 8만원보다 싸다는 얘기다. 그런데 차액이 8만원도 아닌 1~2만원이라면? 2시간에 2만원, 최저임금이다. 현 최저임금 수준을 아끼려고 한 시간을 투입하는 순간 타임푸어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이 워라밸을 추구하고 타임푸어에서 벗어나기란 근본적으로 어렵다.


자기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타인의 노동력을 돈을 주고 사서 실행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야 하며, 그 가격이 계속 오르더라도 어지간해선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배달의 민족이든 뭐든 2만원짜리 시키는데 배달비가 5천원이 넘어도, 3천원짜리 물건도 5천원 배송비를 내는 게 괜찮아야 워라밸이든 타임푸어 탈출이든 외칠 수 있는 기본 요건을 갖추는 셈이다.


게 안 된다면 워라밸이니 타임푸어니 하는 트렌드 놀이, 말장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런 날은 훗날로 미뤄둬야 한다. 불쌍한 청춘이니, OO세대니 하는 말에 감정이입해봤자 자존감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자조섞인 단어, 동정을 유발하는 기성세대의 위로 따위는 거부해라. (지금 20대가 전전세대나 전후 베이비붐 시대보다 힘들고 어렵다는 말은 중간세대인 내가 보기엔 헛소리다.) 저게 과하다 느껴지는 사람이 타임푸어고 워라밸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증거다. 포지셔닝부터 다시 해야 한다.


워라밸이니 타임푸어니 하는 말에 감정이입하고 나를 비롯한 특정세대가 안타깝게 느껴지면 이미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세상은 불공평하다. 인류역사에 평등한 세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인생을 길게 보고 천천히 오늘과 내일 내가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살아야 한다. 오늘 실패하는 다이어트는 앞으로도 실패한다. 오늘 워라밸 추구하겠다고 노동시간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근로소득을 우습게 여기고 기껏 발품팔아 실제 당신의 시간당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소비 절약을 하는 일은 더욱더 자신을 자본주의 시대의 패배자로 스스로 인도하는 것이다.


운동선수로서 치명적인 부상을 반복해서 입어도 재활하고 부활에 성공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과거도 먼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걸 오늘과 내일 할 일, 재활에만 집중한다. 오늘 급한 마음은 재활을 망친다. 게으름도 재활을 망친다. 그냥 묵묵히 오늘 할 일을 하고 내일 할 일을 체크한다. 그렇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에만 온전히 신경을 쏟아야 한다.


아무리 넓게 잡아도 워라밸은 상위 10%만이 누리고 있는 일이고, 상위 10~20%에게는 손에 잡힐 듯 하여 추구해봄직한 가치다. 나머지에겐 그냥 마케팅 용어, 트렌드 세터들의 말장난이다.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게 시간이고, 돈 주고도 못 사는 게 시간인데 시간을 허드렛일로 소비하고 허송세월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면 타임푸어가 아니라 미안하지만 진짜 푸어인 셈이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도 심지어 상위 20%에도 안 속하는데 타임푸어가 아니고 자신의 일과 여가의 밸런스가 조화롭다 느낀다면, 유치하지만 당신이 진짜 승리자다. 인생도 가치관도 결국 멘탈이 관건이고, 행복은 따지고 보면 결국 정신승리 문제다. 정신승리는, 상위 1%도 못한다. 재벌이나 권력자가 행복하지 않은 사례는 자살이나 전과자가 되는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해도 지천에 널렸다. 다만, 이건 정말 어렵다. 이게 되면 당신의 경제적 위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엔 오늘 하루 하루 묵묵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만 집중하고 사는 게 더 쉽다.


난 발품팔고 시간 써가며 물건을 싸게 사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여가도 넉넉하고 일하고 쉬는 시간도 내가 통제하고 그런대로 만족할만큼 나름의 여유도 있다. 하지만, 정신승리는 못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걸핏하면 금이 쩍쩍 가는 유리멘탈 소유자다. 하여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아직 노력 중이다. 멘탈이 무너질 때마다, 잠을 설칠 때마다 일상의 집중에 대해 생각한다. 명상에 관심을 갖고 있고 아이들에게도 멘탈을, 태도를 강조한다. 나를 무너뜨리는 건 외부 요인이 아니라 결국 내 안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격에 기인하지 않고, 후천적으로 정신승리하는 방법을 실천해서 체득한 분들이 계시다면 가르침을 원하니 아시는 분들은 좀 나눠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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