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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Sep 14. 2021

풀어낼 수 없는.

그러나 이제는 평안한 마음으로.

나에겐 형이 하나 있다.


나는 군대에서 요즘 인기를 끈 D.P의 성적 가해를 제외한 모든 걸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수십 배 이상으로 경험해본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마음 속 깊이 남은 상처가 된 폭력은 모두 내 형으로부터 나왔다.


다 적을 수도 없을만큼의 갖가지 폭력을 초등생 이전부터 당하기 시작해 초등학생 시절 최고조를 찍었고, 중학생 때도 담임 선생님이 내 처참한 얼굴을 보고 폭력배들이랑 잘못 어울리는 줄 알고 형이랑 싸워서 맞은 거라는 나의 말이 거짓말이라며, 무슨 형제가 이렇게 때리냐며 거짓말 말라고 어머니를 호출하신 적도 있다.(난 형에게를 제외하면 어디서 맞던 아이는 아니었기에 선생님이 동급생이 아닌 졸업생 혹은 고교생 폭력배에게 맞은 걸로 보셨던 것이다.) 난 생일에도 맞았고, 집에 초대한 친구들 앞에서도 맞았고, 이유라고 쓰기도 민망한 이유로 동네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중 갑자기 괴성과 욕을 하며 돌진해온 형에게 동네 친구들 수십 명 앞에서 소위 파운딩 자세로 깔린 채 맞았었다. 그냥 몇 대 맞는 거 말고 피 터지게 맞는 걸 말하는 거다. 당연히 전교에서 걸핏하면 형에게 맞는 동생이라는 게 암묵적으로, 하지만 널리 알려졌다. 보통 형제가 같은 학교를 다니면 동생이 형의 존재로부터 얻는 우산효과가 있는데 나는 그걸 기대할 수 없었다. 폭력에 익숙했던 터라 나도 싸움에는 도가 터서 다행히 동급생 중에선 난 놈이었지만, 내가 상급생에게 당할 때 형은 한 번도 날 커버쳐준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아버지가 동생 때린 녀석(형에겐 하급생) 찾아서 때려주라고 내보낼 때(오해는 하지 말자. 지금과 달리 쌍팔년도엔 흔한 일이었으니)도 대놓고 싫다고 했었으니, 우산효과 따위는 형제애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여튼 그래서 내게 폭력성이 있다면 그건 다 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내면의 상처라는 것은 군 제대 이후 물리적 폭력에서 자유로워지며 십수 년에 걸쳐서 차근히 아물다가, 서른 즈음 한 때 심리상담을 받을 때 내 안의 분노가 형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 나아가 형의 심리도 조금은 이해할 힌트를 얻었으며 더불어 그에 대한 용서의 실마리를 찾았, 비로소 증오를 손에서 놓을 계기를 마련했었다. 하지만 스무살까지만 해도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바로 내 형일 거라 생각했었을 정도였다. 진심으로 증오했던 때가, 밥상에서 얼굴만 봐도 싫던 시기가 한 7-8년은 되었다. 다행히 저런 과정을 겪어 치유되어 이젠 보복심리나 증오는 없다. 지금은 그냥 나와 무관한 타인으로, 그 또한 하나의 안타까운 인간으로 볼 뿐이다.


그런데 우연히 형의 블로그를 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폭력을 싫어하는지, 자기가 어떤 피해를 입었었는지, 부당한 폭력을 제지하지 않는 국가와 공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잘도 써놓았더라. 공감하며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친구와 10년 가까이 동거하며 얼마 없는 자산도 탕진하고 부모님이 주신 돈도 여자친구에게 다 날려 먹어 빚더미에 앉아 결국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못하고, 연로하신 어머니가 걱정에 마음 쓰여 집에 1시간 넘게 걸려 찾아가서 스스로를 챙길 줄 모르는 장남, 세탁기 돌려주고 방 청소해주는 일을 당신 아들 나이 마흔 가까이 되도록 하게 해놓고, 매일매일 당신 장남 걱정과 노년의 외로움 등에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를 유튜브에 빠져서 세상만사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편향된 사고를 한다며 이해할 수 없다며 써두었더라.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린 후 부모님께 용돈이나 생활비를 드려온 십수 년 간 어머니께 때때로 '절대로 형 주지 마세요'라고 해온 걸 그는 알까. 그 마음이나 심리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둘째 아들이 어떤 걱정으로 노모께 그런 부탁과 당부를 한 것인지 알기나 알까.


마지막 싸움에서 거꾸로 형을 이겼던, 폭력의 마침표를 찍었던 스무살, 그 이래 한 번도 형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 물론 그 이전에도. (우습고 씁쓸한 건 그 날 이래 형은 내게 한 번도 주먹을 든 적이 없다. 언제 어디서건 선빵을 날리던 사람이.)


난 지금도 부모님과 통화하면 형 걱정에 힘이 없는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있다. 중년의 아들 걱정에 잠을 못 주무시는 어머니를 타국에서 보고 있자면 가슴이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다. 장남이 이제 마흔 중반을 넘어가는데도 부모님께 용돈 10만원도 못 드리면서, 몸이 불편하실 때 병원비도 못 드리고 있으면서 착한 동물애호가인양 후원을 받고 있다. 그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며 정직한 인간이 되어 있다. 난 타지에서 부모님 걱정하고 있는데 부모님은 찬 자리에 밀어두고 동물 구하는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저 화상이 과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떤 인간인양 할지 두렵다. 조카 돌잔치에도 뒤늦게 나타나 일찍 사라지고 두돌 때부터는 생일 선물 한 번 준 적 없는 인간이 사랑과 행복과 나눔과 평화와 정당한 가치들에 대해 말하고, 그렇게 세상에 스스로의 인성을 포지셔닝하고 있는 걸 보자니 기가 다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장남이라고 이십 년이 넘도록 매번 모든 면에서 우선적인 고려를 받고 지원을 받고 지위를 누려와놓고, 성인이 된 후로는 온갖 불행과 고난과 어려움은 다 남탓이고 자신은 선하며 합리적이며 고통을 나누는 자로 스스로를 어필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형제이지만 심히 역하다.


오랜만에, 딱 내 아들 나이 때의 생일날 불 끄고 침대에 누워 친구들 얘기하다가 형 친구를 나쁘게 얘기했단 이유로 침대에 누운 채 형에게 두들겨 맞으며 비명 지르던 내가 생각이 다 난다. 내가 군대에서 그 묘사조차 할 수 없던 폭력을 겪으면서도 무탈히 견딜 수 있던 내성과 악과 맷집의 원천이 바로 5살 때부터 15년 간 형에게 맞으며  단련된 세월이라는 건 지금 이 세상에 내 아내만 안다.


그래도 난 이제 증오에 휩싸이진 않는다. 그저 이렇게 글을 쓰고 실소를 머금으며 씁쓸해 할 뿐.






추신. 오랜만에 와서 이런 글이나 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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