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백색 밀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인환 Feb 12. 2021

백색 밀실 - 3 꿈의 부유물

그렇다면 그녀가 꿈에서 깨는 순간, 나 역시 사라지겠지.


 갑자기 생겨난 알 수 없는 공간. 걸음을 옮기자 발바닥에 진득이 붙은 타일에서부터 시린 밀도가 느껴져. 바깥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마른 나뭇잎의 질감이 종처럼 천장을 공명하는 중이야. 숨을 길게 들이마시자 묵은 먼지와 대리석의 깊은 체취가 맡아져. 그럼에도 분명 이곳은 현실이 아닐 거야. 궁전 입구를 벗어나자 생겨난 또 다른 대칭의 공간. 도자기에 새겨진 양각의 문양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고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카펫의 모를 뽑아보기도 했어. 집어 든 푸른색의 실 가닥은 높은 창문에서부터 내리는 채광에 숨겨둔 먼지들을 내보였어. 이곳은 우주 저편 무중력의 공간처럼 무겁고, 작은 창살이 전부인 감옥처럼 갑갑해.


 그런 생각이 들자, 뱃속에서부터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했어. 입구 바깥은 어떤 곳일까. 눈을 감고 상상했어. 평화로운 오후. 낮은 바람이 종아리를 쓸어내고 높은 새들의 날갯짓이 귓가에서 산발하는 풍경. 그러다 문득 그 풍경 너머의 목조 주택을 발견했어. 유체이탈처럼 내 영혼은 금세 그 집의 현관을 넘어갔어. 어떤 여자가 설거지를 하고 있어. 수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소리. 낯익었지. 그러자 흑백의 전파가 잠깐 눈앞을 스쳤다 사라졌어! 눈을 떴어. 하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그 여자의 뒷모습과 낡은 목조주택 내부. 갑자기 그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고 뒤돌아섰어! 내 시선을 느낀 듯 경계심을 담은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중이야. 혹시라도 내가 그녀에게 겁을 준 게 아닐까 미안해졌어. 그녀는 그곳에서 긴 밤을 지새우게 될 것 같았거든. 그러다 어느 한 곳에 그녀의 시선이 멈췄어. 나는 그녀의 짙은 눈동자, 콧날 그리고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궁금해졌어. 거실 벽에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있어. 그림 속 인물을 보려는 찰나,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어. 나는 검은 궁전 중앙, 석관 앞에 무릎을 꿇고 서 있었지. 다른 공간의 궁전에서 보았던 환영들이 기억나. 은하수가 가득한 푸른 밤. 그리고 그 아래 타오르는 듯 생장하는 장미 화원. 그리고 그 여자. 그래 목조주택 속 그 여자였어!

 

  이 관 속에 그 여자가 있을 것 같아. 수북이 쌓인 관의 먼지를 닦아냈어. 높은 창살에서 이는 채광을 온종일 받아내서인지 표면이 따사로워. 마치 사람의 체온처럼 느껴졌지. 관 속 그녀는 살아있을까, 죽어있을까. 아니면 그 어떤 상태도 아닐까. 석관은 무척 무거워서 미동도 하지 않아. 숨겨진 버튼이 있을지 몰라. 석관의 먼지를 두 팔로 쓸어내며 이곳저곳을 눌러보고 밀어보았어. 그러다 석관의 온기만큼 내 몸이 데워졌을 때, 석관은 생물처럼 움틀거리더니 열리기 시작했어! 석관 안에는 좁은 계단으로 이어진 지하 통로가 이어져 있어. 그녀를 만나는 것일까. 아니 왜 그녀를 만나야 할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긴- 심호흡을 맺은 뒤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어. 뚜벅-뚜벅.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으며 계단을 내려가자 아래에서부터 선형의 빛이 보이기 시작해! 놀라웠어. 지하에는 이 궁전만큼 거대한 정사각형의 밀실이 있어! 위, 아래 그리고 사방이 1미터 즈음의 정방형 타일로 마감된 빈 공간. 모든 타일이 전광판처럼 빛을 발하고 있어. 눈부심이 가라앉을 때 즘 밀실 중앙의 사람들이 보여! "이봐요!" 허겁지겁 그들에게 달려갔어. 석상처럼 고개 숙인 그들의 어깨를 붙잡았을 때, 나는 주저앉아 버렸어! 


 그들은 사람이 아니야! 아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존재야. 


 수십 명의 여자들. 아니 사람의 형상을 한 어떤 것. 그중 하나는 몸통의 반이 없었고, 여러 개의 얼굴이 겹쳐있는 것도 있었어! 그리고 다른 것은 얼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기도 해. 물체라고도 할 수 없었어. 얼굴이 뚫린 표면에선 절단면의 두께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뚫린 면 내부는 외피와 속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텅 비었어. 마치 가상의 홀로그램처럼. 다른 하나는 머리가 없어. 대신 잘게 다져진 면으로 이루어진 원뿔이 목 위로 솟아있었지. 뿔은 프리즘처럼 반듯한 면으로 밀실의 천장을 관통했어. 아니, 뚫렸다기보다 투과한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어. 보라색 원피스. 하지만 재질과 옷의 길이, 두께 등 세부적인 것이 모두 달라. 직감했어. 이곳은 공방처럼 실패작들을 버려둔 창고일 것이라고. 누군가 그 여자를 만들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생물도, 물체도 아니야. 만질 순 있지만, 존재하지 않아!




 

 그녀는 어쩌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것'일지 몰라. 낡은 목조주택 안에서 겁에 질려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잔상이 생각났어.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어. 나는 그녀들 중 하나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어. 살결이 밀려나는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져. 그때, 그 물체가 내 손목을 잡아챘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뿌리쳤어. 그녀들이 한꺼번에 움틀 대기 시작해! 기괴한 몸짓으로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보고 있어. 그리고 손을 뻗어 걸어오기 시작해.


 "저리 가!" 고함을 지르자, 그들은 귀를 움틀대고는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어.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목소리는 산산이 조각난 유리조각 같기도 했고, 늘어진 진득한 액체 같기도 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 알 수 없는 노랫말을 읊조리고 있어. 나는 급히 계단으로 달려갔어. 그들 중 하나가 몸을 던져 내 발목을 잡았어! 나는 소스라치며 발길질로 뿌리치고는 계단을 황급히 기어올라갔어.


 수십 명의 괴물들이 쫓아오는 중이야! 그들은 서로의 발걸음에 걸려 넘어지며 점점 몸이 겹쳐갔어! 수십 개의 팔다리와 몸통이 뒤섞인 육체 덩어리. 헐떡이며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들의 가녀린 손가락이 힘없이 내 종아리를 스쳐갔고, 그때마다 나는 울부짖으며 벽을 붙잡고 올라섰어.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심장이 쿵쾅거려. 동공이 팽창했고 평소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계단을 짚어 올라갔어! 빛이 보여! 겨우 석관을 뛰쳐나왔을 때, 채광에 비친 내 손톱은 깨져있었고, 팔은 피투성이가 되었지. 쓰린 고통이 밀려오기도 전에 석관 뚜껑을 번쩍 들어 올렸어. 그리고 관에서 솟아오르는 육체 덩어리를 힘껏 내려쳤어! 굉음과 함께 석관 뚜껑은 바스러졌고 그 물체도 더는 움직이지 않아.




 세상은 여전히 고요해. 온몸에서 쓰린 고통이 밀려와. 손톱 몇 개가 사라졌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카펫을 적시는 중이야.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어. 한참 고함을 쏟아내고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기 시작했어. 다시 그 수도승이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해. 하지만 입구는 여전히 바깥 풍경을 담고 있어. 어떡해. 도저히 돌아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입구를 벗어나면 영영 길을 잃어버릴지 모른가는 예감이 들어. 


 그때, 석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악!" 겁에 질린 나는 생각할 것 없이 입구로 달려갔어. 그런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지고 말았어. 바깥 풍경을 담은 입구는 유리 벽처럼 막혀있어! 서둘러 고개 돌려 석관을 보았어!


 그런데 괴물이 보이지 않아. 대신 멀쩡한 그 여자 하나가 다소곳이 서 있어. 나는 여전히 부릅뜬 눈과 거친 숨이 새는 악다문 입술로 그녀를 쳐다보는 중이야. 반대로 잔상에서 보았던 눈매, 콧날 그리고 입술 그대로 아름다운 얼굴을 한 그녀.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처럼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어. 그녀와 눈이 마주쳤어! 찰랑이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지금 부서진 석관을 밟고 서있어. 마치 무덤에서 깨어난 존재처럼. 높은 창문에서 새는 채광이 그녀를 더 신비롭게 보이게 해. 


 그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채광을 받는 그녀의 등 쪽에서부터 반투명의 기하학 형상들이 아지랑이처럼 돋아나고 있어. 그녀는 어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중이야. 꼭 그 모습이 햇빛에 아파하는 흡혈귀 같았지. 나는 입구 기둥에 몸을 바싹 붙인 채 말을 걸었어. "네가 아픈 건 어쩌면 햇빛 때문일지 몰라."


 그녀는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채광을 피해 몇 걸음 물러섰어. 그러자 정말 아지랑이가 사그라들어.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어. "정말이네. 더는 따갑지 않아." 그녀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어. 그녀의 목덜미에 뚫린 구멍이 점점 아무는 중이야. 종이처럼 얇은 선과 면들이 세포처럼 겹쳐 분열하며 살갗을 이루기 시작했어.


 그녀가 입 다문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어. "오지 마!" 나는 그녀에게 소리치며 손사래를

 쳤어. 그녀는 분명 그 괴물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녀가 물었어. "너는 누구니?" 


 "아..."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어. 그 한마디는 마치 주술처럼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어.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다시 그 궁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힘이 풀린 나는 입구 기둥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어. 그리고 나지막이 대답했어. "나는 내가 누군지 몰라. 기억이 나지 않아. 너는 누구니?"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어. "나는 미지라고 해." 그러더니 금세 표정이 굳어졌어.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어. 그래서 병원에 있었지. 분명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에 있네. 이곳은 어디니? 아니, 그것보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식물인간 같은 게 되어버렸거든, 아마도 꿈을 꾸는 건가. 그러기엔 너무 감각이 생생해. 그래도 꿈을 꾸는 걸까. 음, 아마 꿈일 거야. 재미있네. 너는 이름이 뭐니? 아, 모른다고 했지. 내가 지어줄까?"


 쉼 없이 재잘대며 웃는 그녀는 지금 이곳이 꿈이라고 생각하나 봐.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었대. 석관을 말하는 건가 봐. 얼마나 갑갑했을까. 그것보다 그녀의 말에, 나는 정말로 이곳이 그녀의 꿈의 세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나는 그녀의 꿈속 부유물일 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 생각에 미치자,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듯했지. 그렇다면 그녀가 꿈에서 깨는 순간, 나는 사라져 버리는 걸까. 다시 흑백의 점으로 돌아가는 걸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삶의 목적을 완수한 것이니까.


 그녀는 지금 진중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어. 내 이름을 생각하고 있나 봐.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어. 내 이름을 무엇으로 지어줄까. 그녀가 입을 벌려 한마디를 내뱉으면, 나는 정말 그것이 되는 걸까.


 그녀가 손뼉을 치며 외쳤어. "목성!"


 "목성?" 내가 묻자, 그녀가 대답했어.


 "지금 너,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이 꼭 커다란 별에 걸터앉은 조그만 아이 같아. 그래도 나는 제일 큰 별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목성." 나는 나지막이 그녀가 지어준 이름을 읊조렸어. 나는 이제부터 목성이 된 거야.


 나는 얼른 대답했어. "고마워! 목성, 마음에 들어!"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게 얼마만인지! 꿈이라도 실컷 뛰어놀고 싶어!" 그녀는 내게 성큼 다가와선 손목을 잡아 일으켰어.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꼬집어보고는 말했지. "꿈이라도 꽤 생생하구나. 어서 밖으로 나가자!" 벅차올랐어. 그녀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밖을 나갈 수 없어! 보이지 않는 벽이 있거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허무하게 입구를 통과했어. 입구 공중에 균열처럼 희멀건한 윤곽이 생겨났어. "어서 와!" 그녀는 나를 입구 바깥으로 끌어당겼어. 역시 이곳은 그녀의 꿈일 거야. 그리고 난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어떤 것'.


 몇 걸음을 걷던 그녀가 갑자기 고꾸라졌어! 


 나는 화들짝 놀래 그녀를 안아 들고는 어깨를 흔들었어. "왜 그래! 정신 차려!" 그녀는 전원이 나간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아. 마치 식물인간처럼. 나는 그녀의 머리를 무릎에 기대어 눕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냥 입구 바깥에 앉아있게 되었어.

매거진의 이전글 백색 밀실 - 2 검은 무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