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백색 밀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인환 Feb 14. 2021

백색밀실 - 4 대칭의 세계

대칭 세계의 입구. 그녀의 살짝 벌린 입술 안이라는 건 알아냈어.

 수도승은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궁전 입구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 지금 궁전 바깥에는 흩날리는 눈발과 풍성히 우거진 초목만이 보일 뿐이야. 무전기에서 삑- 하는 신호음이 울렸어. 수도승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무거운 수화기를 두터운 어깨와 턱 사이에 걸쳤어. 그리고 말했지.  


 "미확인 물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 --" 수화기 너머에선 목소리 대신 모스 부호 같은 기계음만 들려. 


 수도승은 즉각 대답했어. "삭제되었다고 판단합니다. 확신하려면 더 시간이 걸립니다. 당장 확답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당신이 설계한 이 공간에선 삭제된 데이터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점. 따라서 삭제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참조로 저는 분명 비용과 시간이 더 들어도, 삭제된 데이터를 보관하고 검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전기 너머의 존재는 대답이 없어. 수도승은 말을 이어갔지.


 "그리고 다음. 시간을 두면 그의 생사를 확신할 수 있다는 이유로는, 이 공간은 빛을 통해 모든 개체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는 빛이 들지 않는 어떤 곳으로 빨려들어갔을지 모릅니다. 곧 이 공간의 모든 물체의 렌더링 속성에 빛을 입힐 생각입니다. 당장 그 작업을 할 수 없는 이유로는, 최근 시스템의 오류로 폭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산란하는 눈발의 입자 때문에 빛을 입혀도 제대로 물체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눈발은 이곳 시간으로 11시간 뒤 멈출 예정입니다. 당신의 시간으로는 66분입니다. 그때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 물체는 백색 궁전 안에 보관된 당신의 외형 정보와 동일합니다. 아마도 당신의 잘못된 판단 - 삭제된 데이터를 검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로 보입니다. 다행히 그 페르소나는 당신의 기억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백색 궁전 안 당신의 육체와 결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그곳은 아직까지 안전합니다. 어떤 침입자의 흔적도 없습니다. 당신이 걱정하는 것 같아 제안하자면, 검은 궁전 안 당신의 '만들어진' 연인을 깨우겠습니다. 그리고 그 물체의 존재가 확실히 사라질 때까지 안전한 곳에 옮겨두겠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재워두겠습니다."


 "-." 짧은 신호에, 수도승은 훗- 하는 냉소적인 웃음을 뱉었어. 그리고 대답했지.


 "그런 건 잘 모릅니다. 그가 당신이냐고요? 흣- 그는 당신과 내가 알 수 없는 삭제된 데이터들이 쌓인 공간에서 자발적으로 태어난 페르소나입니다. 당신이 매료된 고대 신화에 비유하자면 당신이 흘린 피와 눈물에서 태어난 새로운 신 같다고나 할까요." 흣흣-. 그는 말을 끊고는 그 어색한 웃음을 한참 뱉어냈어. "농담입니다. 이런 농담이 싫으시면 제 성향을 편집해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무튼 그는 그저 버그일 뿐입니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직접 삭제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무전기 너머에서 더는 말이 없었어. 수도승은 무전기를 허리에 맨 가죽끈의 거치대에 다시 집어넣었어.




 수도승은 검은 궁전 중앙의 석관을 매만졌어. 그리고 무작위의 숫자와 기호를 빠른 속도로 읊조리기 시작했지. 그러자 석관이 웅장한 굉음과 함께 수천 개의 조각들로 퍼져나갔어. 그는 눙숙하게 대리석 조각을 헤집으며 지하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어. 지하에는 유리와 미지가 만났던 거대한 백색 밀실이 보여. 다만 이곳은 그와 그녀가 있던 공간이 아니었지. 백색 밀실 중점에는 한 여자가 서 있어. 목성이 있던 세계와는 달리 그곳에는 완벽한 모습의 그녀 하나만이 존재해. 수도승은 정장 바지 허리춤을 끌어올리고는 둔탁하게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어. 그리고 그녀 손목에 입을 맞추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어.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을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그녀가 눈을 떴어. 그리고 얼음이 녹아내리듯 조금씩 몸이 풀리기 시작했지. 수도승은 그녀를 흘겨보며 혼잣말을 내뱄었어. "역겨운 명령어야. 입에 붙질 않는다니깐. 이 짓도 이제 지겨워. 무슨 창고 관리인도 아니고 말이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수도승을 보며 흠칫 놀라고는 두 걸음 정도 뒷걸음질 쳤어. 수도승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 "어이, 깡통. 잘 지냈나. 당분간 널 옮겨둬야겠다. 어디에 둘지 생각해봤는데, 강 속이나, 산기슭에 잠깐 묻어두는 게 안전할 것 같아. 물론 유리에겐 잘 말해둬야겠지. 포근한 구름 속에 눕혀두었다던지." 흣흣흣- 그는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맺었어. "나중에 유리가 이곳에 와서 너를 흙밭에서 캐어내도 웃길 것 같네. 그럴 때면 심 봤네!라고 외치는 거야. 훗흣-."




 "당신은 누구인가요?" 혼잣말을 하던 수도승에게, 그녀가 놀란 눈으로 말했어.


 수도승의 눈이 커졌어. 그리고 몸이 굳었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수도승은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했어. "저는 당신을 섬기는 수도승입니다. 당신은 이 세계의 여신이죠. 곤히 잠든 당신을 깨워서 황송할 따름입니다. 지금 이 세계에 악마가 태어났어요. 당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어요. 나와 함께 일이 마무리될 동안 다른 거처에서 몸을 피신해야 해요. 저와 하늘 위 구름 속으로 올라갑시다." 수도승은 어느새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어. 두터운 살집에 허리춤의 무전기가 삐져나왔지. 


 미지는 유심히 그 물체를 보다가 말했어. "목성은 어디 갔나요?"

 

 수도승은 대답했어. "이 세계엔 목성은 존재하지 않아요. 원하신다면 구름에 누워 구경할 수 있도록 만들어드리죠."


 미지가 대답했어. "아니요, 그 남자요. 양쪽 눈 밑에 귀여운 점이 박힌 사람이요."


 고개 숙인 수도승의 눈이 다시 한번 부릅 떠졌어. 그는 이를 악물었지. 그리고 다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어. "그를 만난 적이 있나요?" 


 미지는 사뿐히 궁전을 돌아보며 말했어. "그럼요. 제가 이름도 지어준 걸요. 손가락에 피가 나서 마침 붕대라도 묶어줄까 하던 참이었는데. 그런데 분명 저는 검은색 궁전 안에 있었는데. 왜 이곳에 있는 거죠?"


 "궁전 안에 있었다... 잠깐 정신을 잃으셨나 보군요. 이곳 위층이 궁전이에요. 나와 함께 올라가시죠." 수도승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축하듯 계단을 올라섰어. 


 빛이 들지 않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녀가 말했어.


 "깜깜해서 무서우니까, 말을 좀 할게요. 여기 와본 적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꿈일까. 무척 많은 사람들이 헐레벌떡 계단을 올라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그들이 뭉쳐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어요. 그리고 빛이 보였고, 덩어리는 햇살에 녹아버렸어요. 그리고 내가 되었죠."


 수도승이 혼잣말을 하듯 대답했어. "흥미롭네요. 그곳은 이곳과 동일한 모습의 세계인가 보군요. 잠깐, 궁전 입구에서 보았던 대칭의 궁전은 잔상이 아니었군. 실제 하는 대칭의 공간이라. 흠...... 유리에게 알려야 할까."


 잠자코 수도승의 말을 듣고 있던 미지가 말했어.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오랫동안 홀로 이 곳을 건설하다 보니,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네요!" 흣흣흣! 그는 과장된 웃음 내보이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어. 수도승과 미지는 계단을 올라서 검은 궁전에 닿았어.


 "이곳이에요! 내가 있던 곳. 그런데, 음? 여기 검은 관이 부서져서 산산조각이 났었는데. 이건 뭐죠?" 


 그녀는 정육면체로 공중에 분해된 관의 조각을 가리켰어. 수도승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기호들을 읊조렸어. 그러자 조각들은 한데 뭉쳐 검은 석관으로 변했지. 그녀가 감탄하듯 외쳤어! "마술인가요? 아무튼 목성은 저기 입구를 통해 나갔어요. 어서 와요!" 


 그녀는 입구로 달려갔어. 하지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버렸어. 


 "아야, 분명 나갔었는데."


 미지를 주시하던 수도승은 결단을 내린 듯 말했어. "분명, 다른 세계가 있어. 아가씨, 이곳은 제가 관리하는 세계랍니다. 입구마다 보이지 않는 방화벽이 있고, 아직까진 저만이 드나들 수 있죠. 반대로 그 버려진 것들이 모인 대칭의 세계는 당신이 제어할 수 있는 곳인가 보군요. 그리고 그 남자. 목성이라고요? 그를 찾는 걸 도와줄게요. 그러려면 당신이 있었던 세계로 같이 가야 해요. 안내해주세요."


 "제가요? 전 모르겠어요. 어떻게 그곳으로 가는지."




 그때 검은 궁전 바깥 햇살이 강해졌어. 


 수도승은 고개 돌려 궁전 입구를 바라보았어. 거짓말처럼 눈발이 사라졌어. 우거진 초목 위로 쌓인 눈의 흔적마저 거짓말처럼 사라졌지. 그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어. "아직 정해진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점점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단 말이지." 수도승은 주먹을 불끈 쥐었어. 두터운 손아귀는 잠깐 회색 빛을 발했어.


 수도승은 미지에게 눈을 감으라는 시늉을 했어. "곧 세상이 온통 빛으로 가득할 겁니다. 눈이 부실 거예요. 꼭 감고 있어요." 미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질끈 감았어. 수도승은 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어. 그러자 궁전의 모든 면이 점차 발광하기 시작했어. 


 수도승은 심안으로 이 세상 모든 곳을 샅샅이 확인했어. 협곡과 강 그리고 도시 안 수천 명의 사람들의 얼굴과 몸짓, 목소리를 확인했지. 그러다 빛이 침입하지 못하는 어떤 공간을 감지했어! 그 기운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 정체가 바로 눈앞의 미지. 그녀의 살짝 벌린 입술 안이라는 건 알아냈어.


 미지는 질끈 감은 눈꺼풀 주위로 빛이 잦아드는 걸 느꼈어. 살짝 눈을 떴지. 그러자 수도승이 빤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눈빛이 매서워. 그녀가 뒷걸음질 치자 수도승이 말했어. "당신도 주문을 외울 수 있군. 유리가 내게 말하지 않았어. 아니면 그도 모르는 걸까. 아무튼 당신은 그를 불러낼 수 있을 거야. 나를 그 세계에 데려다 줄 수도 있고." 


 팔짱을 낀 채 미지를 노려보던 수도승은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말을 뱉었어. 


 "아가씨, 지금 생각나는 노래가 있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백색 밀실 - 3 꿈의 부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