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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Oct 07. 2020

오늘, 재택근무와 집안일

 어제의 재택근무가 오늘 새 아침의 어른이를 만들었다.

 어제 화요일, 첫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걱정이다. 보통 집에선 낮잠을 늘어지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다. 평일 업무를 집에서 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남들보다 늦게  보게 되었다. (최소 2주에 한두 번씩은 재택근무를 해야한다.)


 어김없이 6시에 눈을 떴다. 출근길에 대략 40분 정도가 걸린다. 그만큼 더 누워있었고, 회사에 도착하는 8시에 맞춰 집 근처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보통 업무를 보며 마시는 양을 감안해 벤티 사이즈 오늘의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 동네에 회사원이 이렇게 많았었나. 그동안 우리들의 시간대가 맞지 않았나 보다. 하얀 하늘빛 수평선부터 내려오는 언덕길의 졸린 사람들. 그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이 골목에 나뿐이다. 그들은 내가 루틴을 맞추고자 재택근무를 하러 집으로 출근하는 시늉을 하고 있단 걸 알까. 관심 없겠지만.




 업무를 시작하려고 책상에 앉았을 때, 바구니에 가득 쌓인 수건이 눈에 밟혔다. 세탁기에 넣었다. 그러다 옷방에 헤집어진 옷가지도 보였고, 스타일러에 걸었다.




 다시 책상에 앉아 메일을 읽고 오늘 할 일을 정리한 다음 하나씩 업무를 보았다.

 

 생각보다 원격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어서, 포토샵과 일러스트 그리고 3D 프로그램이 문제없이 돌아갔다. 문제는 나다. 새 키보드와 마우스가 익숙하지 않고 여러 원격 창들이 헷갈렸다. 그리고 집 안에서 홀로 업무를 헤쳐가는 지금, 회사에 있는 동료들의 상황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연락을 하면 알 수 있지만, 굳이 물어볼 명분이 없다. 파티션이 사방으로 둘러진 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기분. 그래서 드는 불안감에 더욱 쉼 없이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저 멀리 회사 책상에 놓인 데스크톱에 원격으로 접속해 일을 보는 중이다. 그래서 내 책상 위 모니터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업무를 그대로 띄어놓고 있을지 모른다. 마치 유령이 일을 하는 것처럼. 혹시 지금 잠깐 티타임을 가진 동료들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내 모니터를 보며 농담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얘가 지금 뭐 하고 있나 라고.




 '!' 알람음이 울렸다. 벌써 세탁이 끝났다. 하던 일을 멈추고 빨래를 건조대에 널었다. 그리고 스타일러에 걸어둔 옷들을 갈았다. 다시 책상에 앉으려다가, 남은 빨래 더미를 세탁기에 또 넣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원격근무를 하면 빨래가 밀릴 일은 없을 거라고. 하는 김에 침실에 가서 살균 겸 탈취 스프레이를 잔뜩 뿌리고, 그런 김에 온 실내를 방역했다. 그리고 청소기를 꺼내 집안을 한 바퀴 돌고 자리에 앉았다. 문득 생각이 든다. 지금 왜 이러고 있을까. 나 이렇게 부지런하지 않는데.




 점심시간이 되었다.


 평소 나는 주말이면 오전에 음식을 거하게 시켜먹는 편이다. 그러고 낮잠을 잔다. 하지만 오늘은 그래선 안된다. 냉장고에 있는 냉동도시락이 생각났다. 양이 적고 맛이 없어서 가득 쌓여 있었는데. 딱 지금 필요한 음식이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책상에서 먹고 있는 탓인지, 밥을 먹으며 계속 일을 했다. 재택근무를 하면 점심시간, 밤낮없이 무작정 일하게 된다는 선배의 말이 이해가 된다.


 '!' 전화가 왔다. 월요일 날 2주 만의 출근. 그때 열어본 127통의 메일 중에 전화영어 수강 안내문이 있었다. 그날 출근길 셔틀버스 안에서 영어수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마침 했었는데. 그래서 근 5년 만에 수업을 등록했다. 수업 전 실력 테스트 전화가 온다고 했었는데. 그 전화였다. 그리고 Level 4를 받았다. 첫 입사할 때 6을 받고, 더 노력해서 7을 받아야지 하다가 작년에 5를 받았다. 영어 선생님은 내게 7을 받으려면, 열심히 해야겠다고 했다. 조만간 기술발전에 힘입어 동시 번역기가 나오면 굳이 영어공부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라고 합리화를 하면서도, 의기소침해졌다. 그냥 취소할까 생각도 든다.




 저녁 6시. 익숙지 않은 환경에 꽤 피곤해졌다. 업무내역을 정리해 메일로 보내고 노트북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낮에 돌린 빨래가 끝나 있었다. 나는 관성의 법칙에 따라 다시 옷감을 건조대에 널고 스타일러를 다시 돌렸다. 그런 김에 저번 주에 산 아이보리색 슬랙스 기장을 수선하러 동네 수선집에 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엑셀런트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왔다. (낱개로 포장되어 있어 밥 먹고 입가심하기 딱 좋다. 식사가 너무 달았을 때는 담백한 파란색 바닐라를 먹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달달한 노란색 프렌치 바닐라를 골라 먹는다.) 머그컵에 달달한 와인을 따라 마시는 동안 주문했던 저녁식사가 도착했고 나는 블랙홀에 관한 유튜브를 보며 첫 재택업무를 마감했다.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오늘. 오전 5시에 눈을 떴다.


 일찍 잠들었던 탓에 아무리 뒤척여도 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를 벗어나 쓰레기통을 비우고 어제 먹었던 용기들을 분리수거했다. 그리고 베개 커버를 갈았고 옷방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한 번도 아침에 그런 부산을 떤 적이 없었다. 또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러고 있을까. 


 그러다 관성의 법칙 때문이란 걸 알았다. 꽤 일찍 일어난 덕분인지 여유를 부렸음에도 셔틀버스 첫 차를 탔다. 사무실 책상에 내 모니터를 보고 깨달았다. 원격 업무를 할 때는 화면보호기 같은 게 떠 있단 걸. 누구도 내 업무활동을 보지 않았다. 나는 출근해서 메일을 확인한 뒤 책상을 닦았다. 그리고 공용 테이블을 치우고 이것저것 정리정돈을 했다. 하지 않던 일을 말이다. 또 왜 이러고 있을까. 그러면서도 기분이 참 좋다. 마치 새나라의 어른이가 된 기분이다. 내일도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일기를 쓰다 벌써 잠잘 시간을 넘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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