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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규 Mar 12. 2019

나는 먼저 나의 코치가 되기로 했다

암묵지와 형식지

다른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에이터도 두 가지 지식을 다룬다. 형식지와 암묵지다.

사람들은 크리에이터에게 "어떻게 했나요?"하고 묻는다. 크리에이터는 "이렇게 했고, 저렇게 했다"고 대답한다. 김하온도 그와 비슷한 질문을 받았나보다. [고등래퍼 김하온의 인생 ‘최애’ 책과 독서관은?]

형식지의 형태로 대답하는 게 피차 간에 쉽다. 명문화할 수 있고 불렛포인트를 잡아서 정리할 수 있어야 전문가에게 중요한 내용을 배운 기분이 든다. 김하온 추천도서를 읽는 예비 고등래퍼들이 한 둘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형식지는 종종 중요한 걸 누락시킬 때가 있다. 자신도 잘 모르고 있는 A라는 암묵지를 따라 움직이다가 책을 집어들게 되었을 뿐일지 모른다. 김하온의 암묵지를 배우려면 차라리 그의 자퇴계획서[고등래퍼2 우승자 김하온, 부모님 설득시킨 '자퇴계획서']를 살펴 보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공 들인 계획서를 보면, 자퇴를 앞둔 때 이미 그에겐 설득하고 싶은 내면의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그가 어떤 것에 저항하고 싶었고, 무엇을 설득하고 싶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어떤 감식안을 길러왔는지를 추정해보는 게 더 나은 훈련 방법일 것이다.


암묵지의 성격상 그걸 갖춘 사람이라 해도 혼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간명한 답을 원한다. "곡 작업 순서가 어떻게 돼요?", "어떻게 했어요?"  고민이 담기지 않은 질문을 할수록, 대답도 더욱 간결해진다. 이렇게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아무말대잔치에 빠진다. "매일같이 생생하게 꿈꿨더니 이루어지던 걸요?"가 괜히 나오지 않는다.


그가 읽은 책을 읽는다고 김하온 스타일이 되지 않는다. 검정 티셔츠를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흉내낸다고 해서 잡스가 되는 게 아니라는 친숙한 결론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중요한 건 형식지가 아니라 암묵지다. 그리고 암묵지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콘텐츠 코치의 역할

콘텐츠 코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할까?

콘텐츠 코치가 스스로 해냈던 방법을 명료하게 뽑아내고 그걸 이식하는 기술로 봐야할까?


경험에 의해 보자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순서를 안내하고 코치이(coachee)가 이걸 따른다고 해서 동일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 입력받은대로 아웃풋을 내는 알고리즘과 다르다.

내가 이해하는 콘텐츠 코치의 역할은 코치이가 자신만의 암묵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암묵지를 스스로 발견하고, 훈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려면 코치이의 머리로 함께 생각해주어야 한다.


그가 왜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지 물어주고, 코치이 스스로 몰랐던 뒷통수에 숨겨져 있던 생각을 발견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또, 그 과정을 지속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게 되고 나면, 코치이는 스스로가 자신의 코치가 되어 필요한 자신의 암묵지로 그에 맞는 형식지를 찾아내고 콘텐츠를 만들어간다.


모두가 같은 재료를 쓰지 않는다. 재료의 질감도 다르며, 크기도 다르다. 재료를 다루는 능력도 편차가 있다. 그 사람이 놓인 맥락을 이해하고서 암묵지를 훈련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코치이를 도우면, 코치이는 만들어 보는 과정을 한 루프 진행하면서 자신에게 적절한 암묵지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보자.




『생산적인 생각습관』 콘텐츠를 만들면서 발견한 암묵지

목차와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가장 많이 접하는 형식지는 아마도 ‘목차’에 관한 것이다. 『원자 폭탄 만들기』로 퓰리쳐상을 수상한 리처드 로저는 구조를 짜는 것이 “틀을 짜는 능력, 전체를 다스리는 능력”이라고 했다. 나는 이 전체를 다루는 능력에 관해 다산 정약용에게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다산은 어떤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먼저 목차부터 뽑아냈다.[선정문목先定門目]  

목차가 중요하다는 건 쉽게 수긍이 갔다. 그런데 다산처럼 목차가 줄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산이 아니었다. 갑자기 목차를 어떻게 잡으란 건가.


작년 12월에 내놓은 콘텐츠『생산적인 생각습관』는 크리에이터가 갖추면 도움이 될 7가지 습관을 소개했다. 이렇게 이 콘텐츠를 통해서 뭘 말할지 개략적인 흐름은 정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목차를 잡을 때 바로 문제가 생겼다. 처음 『생산적인 생각습관』를 구성할 때, 7가지 목차를 한 번에 그리지 못했다. 기록습관, 정리습관, 그리고 생산습관이라는 3가지 목차는 뚜렷하게 갖고 있었지만, 나머지 목차는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워크플로위(workflowy)로 정리한 『생산적인 생각습관』가목차



목차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다가, 목차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좋은 생각이 났다. 아래의 문장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목차 잡기는 작가 자신에게도 무척 중요하다. 책 한 권 분량의 방대한 생각은 한 번에 정리할 수 없다. 큰 덩어리를 쪼개고 또 쪼개서 손에 쥐고 반죽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목차를 쪼개다 보면 손으로 주무를 수 있을 만큼 반죽이 작아진다.” --『생산적인 생각습관』


목차의 역할을 발견하곤, 나에게 구실 좋게 설명을 해 본 셈이다. 여전히 목차를 어떻게 잡아야 할 지 몰랐다. 그런데 목차에 대해서 완결짓지 못한 상태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우선 내가 다룰 수 있는 ‘기록습관’, ‘정리습관’, ‘생산습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글을 쓰다보면 파생되는 키워드가 생긴다. 이를 한 곳에 잘 모아둔다. 그 키워드를 이리저리 굴려보면 다른 목차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글이 잘 안 써져서 전에 쓴 글을 다듬어봤다. 글을 다듬다보니까, 콘텐츠를 만든다는 건 끊임없는 개선과정이라는 걸 스스로 상기했다. 여기서 ‘개선습관’이라는 목차를 생각하게 됐다. 처음에 ‘개선습관’에는 한 가지 밖에 담을 수 없었다. ‘글은 개선되어야 한다’는 한 문장이었다.


그러다가, 그레이스 호퍼의 책에서 호퍼가 자신의 하버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글쓰기까지 가르쳤다는 구절을 발견한다. 여기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과 개발자 사이에서 유사성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개발자들의 디버깅(debugging)이 눈에 들어왔고 이 내용을 ‘개선습관’에 담을 수 있었다.


또, 이런 식으로 내가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을 들여다보다가 내용이 더해지는 걸 보면서,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개선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내용도 ‘개선습관’에 담을 수 있었다.


콘텐츠를 만들다 보면 예상할 수 없는 형태의 암묵지가 쌓인다. 그 암묵지는 다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기록하고 정리해둔다.


'목차를 잡는다'처럼 간단해 보이는 형식지라고 해도 이렇게 다양한 암묵지가 깃든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내가 배운 암묵지에 대해 넘버링을 해서 더 깔끔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볼드처리만 해 두었다. 해 보면서, 만들어 보면서 그 자신만이 체득하는 암묵지가 있다.  

형식지로 전달되는 것들 이면에는 암묵지로 체화해야 할 영역을 늘 품고 있다.

이런 식으로『생산적인 생각습관』를 만들면서 내가 나를 코칭하기 시작했다.




형식지에 한계가 있는 이유

여전히 콘텐츠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불렛포인트나 번호를 매기고 착착 정리해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왠지 그렇게 정돈된 것이라야 전문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다 걷어내고 콘텐츠를 만드는 방법/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이유를 하나만 대면 다음과 같다.


“만들고 싶은 콘텐츠에 대해서
오랫동안 깊게 생각하는 것”



이로부터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허무하지만 정말 그렇다.


자기 전에 뒤척이면서, 대화 중에, 길을 걷다가, 샤워하다가. 내가 만들고자 하는 콘텐츠를 머리에 품고 고아 내는 것이다.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잊어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나타나면 그걸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기록이 쌓이면 나중에 정리를 한다. 형식지는 중요한 암묵지로부터 형태를 부여받는다.


‘만들고 싶은 걸 오랫동안 지독하게 생각하세요’ 라고 한 줄 짜리 콘텐츠를 만들 수 없으니, 그 과정을 덩어리 짓고 목차를 구성해서 형식지로 나눠 담을 뿐이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떤 플랫폼이 좋은가요?"를 넘어서 '내가 왜 만들어야 할까", "왜 내게 만드는 일이 중요할까"같은 질문으로 옮겨간다.

‘왜 만들것인가?’/'왜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다음 콘텐츠에서 더 다뤄보기로 한다.




콘텐츠를 만들면서 얻을 수 있는 것

그러면 도대체 콘텐츠를 왜 만드는가?  셋을 꼽으라면 ‘재미와 학습과 성장’을 꼽겠다.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어가는 건 전체를 구성하는 능력을 가장 빠르게 훈련할 수 있는 길이다. 또 전체를 구성해내는 힘이 지속적으로 커진다. 회사나 조직에 속해서 커리어의 성장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직급 수준, 직무 등에 따라 성장폭이 제한되기도 한다. 원래는 120%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인데 스스로 제약하기도 한다. 크리에이터엔 제약이란 없기 때문에 학습과 성장에 관심이 큰 사람이라면 탐내 볼 영역이다. 다산 정약용을 보자.


다산 정약용을 시대가 낳은 천재라고 부르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은 난 사람이고, 처음부터 모든 걸 다 할 줄 알았던 사람이라고 보면 속이 편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도 처음부터 방대한 영역을 모두 꿰차고 있던 건 아니다.


"다산은 어떻게 이렇게 분야를 넘나들며 쓸 수 있었을까? 그저 모든 분야에 능했던 천재였던 것일까?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또 다산은 이전에 배다리의 공학원리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성을 쌓거나 기계를 만들어본 경험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왕명에 따라 단서가 될 만한 작은 자료에서 출발하여 이것을 확장하고 부연해 한 치의 착오 없이 화성의 축성도면에서부터 수레의 설계도면에 이르기까지 직접 만들어냈다.” 다산은 모든 걸 알았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만들다 보니까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알고 있어서 만든 것이 아니고, 만들어야 하니까 필요에 의해 배운 것이다."  -- 『생산적인 생각습관』


처음부터 모든 걸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손에 주어진 것에서 출발해서 전체를 구성하는 훈련을 하기 시작하면, 이전에라면 넘보지 못할 큰 주제들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전 글에서[커리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만드는 능력은 휘발되지 않는다” 고 말했지만, 휘발되지 않을 뿐더러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다. 내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점차 넓어진다.


결정구조에서 물질이 차차 커지는 현상을 결정성장(crystal growth)이라 부른다. 크리에이터의 성장 곡선은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결정은 갑자기 큰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 생겨 차차 커가는 것이다.”



나사형 성장이론(spiral growth theory)



정체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 학습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콘텐츠를 만들어보라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민규

- 책 《콘텐츠 가드닝》 ,  《회사 말고 내 콘텐츠》  저자

- 콘텐츠 기획자, 콘텐츠 코치


커리어의 궤도를 이탈하고 콘텐츠를 자전축으로 삼고 있는 창작자. 창작 경험이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 아래 콘텐츠 코치로 일하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창작을 경험하고 콘텐츠를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 코칭을 통해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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