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콘텐츠' 만들 때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이 계시다. 나도 그랬다. 겸손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데, 도대체 뭘 만들지. 다들 특별한 사람들이라 뭔가 만드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본다. 만들었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이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면, 우리는 콘텐츠만 소비하지 않는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도 함께 소비한다. 우리는 저자의 약력을 살피고, 어떤 커리어를 쌓았는지도 눈여겨 본다. 또, 이 사람은 이걸 왜 썼는지 궁금해한다. 콘텐츠도 궁금하지만 그걸 만든 사람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콘텐츠에도 아이덴티티가 있다고 봤다. 그걸 만든 사람의 아이덴티티가 콘텐츠에 녹아 있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본다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은 콘텐츠만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 콘텐츠를 만드는 '나 자신'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지난 6월 피터님, 석현님과 함께한 자리에서 <콘텐츠, 아이덴티티가 먼저다>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나눈 내용을 소개한다. '내 콘텐츠'를 시작할 때 맞딱뜨리는 얼마간의 막막함을 덜어주면 좋겠다.
다섯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양보할 수 없는 '나'가 있는가
내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손에 쥔 것을 조합 해보았는가
나는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갖고 있는가
내가 확장될 수 있는 주제인가
아무리 '주인의식'을 갖춘들, 회사 생활에서 온전히 '내 것'인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회사 생활만으로도 '외주'는 충분했다. 만약 이제 '내' 콘텐츠를 하고자 한다면, 이 외주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콘텐츠 소비자로 오랜동안 지내면서 부지불식간에 눈높이가 매우 높아져있다. 그런 이유로 '이제 내 콘텐츠 해야지'할 땐, 내가 아닌 걸 고를 때가 있다. '이런 저런 걸 하면 좀 될 거 같다', 내지는 '저걸 해야 빵 터질텐데'같은 판단들이다.
이러다 보면 트렌드를 보다가, 시장조사를 하다가 만난 콘텐츠를 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든다. 거기서부터 내 오리지널 콘텐츠는 멀어진다. 조금도 내 것이 아닌 것으로부터 출발점을 삼는 것은 위험하다. '내 것' 하겠다고 시작해놓고 '남의 것'하고 있는 셈이다. '내 콘텐츠'를 만들 때 마주할 첫번째 질문은 "내가 지금 외주하려는 거 아닌가?"이다. 양보할 수 없는 '나'는 어디까지인지 범위를 정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내 것'할 거니까, 정말 외주는 안하겠다고 결심했다면 이제 당신의 손에 쥐어진 것을 펼쳐보라. 커리어, 취미, 경험, 독서노트, 자주 보는 사람들, 자주 보는 콘텐츠, 일기장, 메모장, 에버노트 구석에 적힌 기록, 아이디어 노트, 이전에 아이디어 괜찮다고 찍어둔 사진들, 스크린샷, 캡쳐들, 인생 책, 자주 보는 유튜브, 내 강점, .. 아마 '브런치'를 하고 있고, 이 글까지 보게 되었다면 당신의 손에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중에 한 두가지는 뚫어져라 들여다보면, 그걸 가지고 심폐소생을 해볼 생각을 할 수 있다. 원래 처음 손에 쥔 것은 누구에게나 작다. 대가들은 브런치를 하지 않는다. 나는 대가가 아니다. 내 손에도 아주 작은 파랑새 한 마리가 있었을 뿐이다. 계속 그걸 키워볼 방법을 궁리하면 된다. 절박하면 방법은 수십, 수백가지를 만들 수 있다. 손에 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라. 브런치, medium, amazon, 국내 서점, slideshare, quora, youtube, reddit. 정말 많다. 내 손에 든 파랑새 키워드를 갖고 마스터피스에 준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탐구하고, 학습해보라. 그 파랑새는 나중에 새끼를 치고 둥지도 트고, 점점 커진다. 콘텐츠 코칭을 하면서 머릿속에 잔뜩 엉킨채로 뭉텅이진 생각을 꺼내놓고 시각화를 하기만 해도, 자기의 출발점을 발견하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한 번 꺼내보라.
JTBC에서 방영중인 <슈퍼밴드>는 오디션 참여자들이 매주 새로운 팀을 짜고, 각종 악기의 협주를 통해 밴드 공연을 선보이는 프로그램이다. 본선 2라운드 팀 대결에서 한 팀의 접근법이 신선했다. 벤지, 이자원, 김동범 이렇게 셋이 뭉치게 되었는데, 이들은 처음에 "이제 어떤 곡을 만들까?"라는 질문 대신에 "일단 우리가 갖고 있는 걸 꺼내보자"로 접근했다.
이자원은 4개의 능력을 꺼낸다. 멜로디언, 콘트라베이스, 아코디언, 어쿠스틱 기타.
김동범은 6개였다. 일렉 기타, 비트박스, 베이스, 랩, 드럼, 색소폰.
벤지는 프론트맨답게 프로듀싱, MTR, 비트박스, 춤, 랩, 노래, 건반, 바이올린 8개를 할 수 있었다.
4x6x8을 하면 금방 높은 수가 나온다. 사용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 둘만 추가되도 조합을 하게 되면 가짓수가 금방 늘어난다. 이 팀은 이 날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내가 주목한 요소는 '고유함'이다. 조합하면 금방 고유해진다. 오리지널리티가 생긴다. 그런 비슷한 조합을 따라서 만들어내기도 힘들거니와 그 조합을 할 떄는 필연적으로 그들만의 해석을 녹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출간한지 1년 반 정도가 지났지만, 리디북스의 컴퓨터/IT 분야에 아직 스테디셀러에 올라있는 『에버노트 생각서랍 만들기:실전편』은 그런 시도에서 비롯됐다. 디지털 정리와 물건 정리라는 요소를 조합해서 소개한 것이다. 에버노트와 관련한 콘텐츠는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참 많이 있지만, 이 두 가지 요소를 조합해버렸기 때문에 '탁월함'을 논하기 전에 '고유함' 하나는 확실히 챙겼다고 생각한다.
콘텐츠를 만들기에 앞서서 내가 가진 요소를 다 꺼내보자. 경험, 독서경험, 대화, 자주 떠올리는 생각, 자주 보는 것들, 자주 다니는 길, 커리어, 취미, 관심사, 주로 만나는 친구, 여행경험,... 그리 적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다 꺼내놓고 무작위로 조합해보라. 조합하면 고유해진다.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 더 나은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나은 삶을 산다.”
『컨설팅의 비밀』에서 제럴드 와인버그가 남긴 말이다. 나는 이 생각이 많은 통찰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다보면, 문제가 풀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남는 게 있다. 경기에 이기지 못해도체력과 스킬이 남는 운동선수처럼 그렇다.
스타트업 세계에는 '내게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서 창업했어요'형 창업가들이 있다. 마치 이들처럼 콘텐츠 세계에서도 자신의 삶의 문제를 대응하다가 그 해결과정을 콘텐츠에 담아낸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삶의 문제를 정말로 해결했는가와는 별개로 어떤 문제에 대응해 본 사람의 이야기는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이 되곤 한다. 지난 12월에 냈던 『생산적인 생각습관』 6장 '개선습관'에서는 이를 잠깐 언급했다.
남들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주제를 유독 ‘내 문제’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자신이 드러내려는 가치가 또렷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내 삶의 문제를 나열하는 일이다. 끝도 없다. 다 적기도 전에 리스트는 늘어날 것이다. 문제를 펼쳐서 눈에 밟히고 더 낫게 만들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지 모른다. 그것이 비록 콘텐츠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남는 장사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 생산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문제를 개선하는 것은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이다. 내 문제를 개선하는 데서 나만의 콘텐츠가 나온다. 당신에게 해결하고 싶은 절박한 문제가 있다면, 독자를 가질 이유도 충분하다. - 『생산적인 생각습관』, 서민규
콘텐츠를 만들면서 소진되는 경우가 있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므로 당연한 말이 아닐까 싶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콘텐츠를 만드는 동안 학습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해야 할 말을 간추리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참고 도서를 휘적거리다 보면 학습이 일어난다. 오점이 없는 '정답'을 만들어 낼 순 없어도, 거칠었던 내 생각을 다듬는 연습을 할 수 있다. 그 거친 생각은 부드럽게 다듬어져서 이내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내가 만들려는 콘텐츠와 맞닿은 구석을 찾다보면 기막힌 발견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걸 발표자효과(presentor's effect)라 부른다. 학교든 직장이든, 발표를 앞두고 주제를 머리에 머금고 다니다보면, 세상 모든 게 공부거리다. 이 과정은 나를 소진시키지 않는다. 만드는 과정 자체가 나를 충만하게 한다.
<대화의 희열>에서 유시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책을 쓰는 과정에서) 소진되는 게 아니고, 책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채워진다." 그 채워진 힘을 바탕으로 또 다음 책을 쓰는 거라고 이야기를 한다. 공감을 많이 한 대목이다. 『에버노트 생각서랍 만들기』시리즈 콘텐츠를 만들고 돌아보니, 내게 남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 시리즈 콘텐츠를 만들면서 생긴 내 습관들이었다. 이 습관들은 7개로 정리해서 2018년 12월 『생산적인 생각습관』이란 제목으로 내게 됐다. 지금도 이 명제는 내게 유효하다. 연말 출간을 목표로 쓰고 있는 지금 책도 이전 콘텐츠를 만들면서 켜켜이 쌓인 내적 자산을 바탕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시민의 이야기를 받아서 뒤집어 보자면 새로운 질문을 하나 만들어 볼 수 있다.
어떤 콘텐츠를 만들 때, 내가 확장될 수 있지?
많은 경우, '난 어떤 콘텐츠를 만들면 좋을까'에서 출발한다. 콘텐츠 소비자로만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이런 질문을 떠올리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시장을 보고, 카테고리를 읽고 하다보면 "그래서 나는 뭘 만들까?"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자신의 시야, 생각, 관점, 사유를 더 확장시킬 수 있는 주제인지를 곰곰히 따져보라. 그 주제를 다루면서 내가 확장되고, 다음엔 더 나은 걸 향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확장되고 싶고, 학습하고 싶고, 의욕이 생기는 분야가 있다면, 그 곳을 출발점으로 삼자.
마지막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특정한 표현자를 '오리지널'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고 밝힌다.
“다른 표현자와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 (문체, 형식, 색채 등)을 갖고 있다 그 사람의 표현이라고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스타일을 스스로 버전업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 스타일은 성장해간다. 언젠까지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런 자발적, 내재적인 자기 혁신력을 갖고 있다”
“그 독자적인 스타일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일반화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되어 가치판단 기준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 혹은 다음 세대의 표현자의 풍부한 인용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 책 《콘텐츠 가드닝》 , 《회사 말고 내 콘텐츠》 저자
- 콘텐츠 기획자, 콘텐츠 코치
커리어의 궤도를 이탈하고 콘텐츠를 자전축으로 삼고 있는 창작자. 창작 경험이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 아래 콘텐츠 코치로 일하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창작을 경험하고 콘텐츠를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 코칭을 통해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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