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 요약본(결말 포함)
글을 한동안 쓰지 않았다. 내가 쓰던 종류의 글과 그 글을 둘러싼 사람과 환경에 실망하다 환멸을 느꼈다.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류하고, 나도 썼고 그들의 작품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더 깊게 교류하고 싶었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는 소위 순문학에는 관심이 떨어졌고, 어쩌다 보니 종이로 출판된 저작물에도 관심이 사라졌다. 이제 한국 단편 소설집은 사지 않고, 장편도 사지 않는다.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내가 산 마지막 한국 소설가의 단편집이었고, 아마 한동안은 여전히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정지돈의 작품 중에 몇은 살지 모르겠지만. 다른 작가의 작품은 읽거나 살까 싶다.
이렇게 되고 시간이 좀 흐르다 보니, 다시 글에 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글 쓰는 이가 자신을 위한 글이 아닌 읽는 사람을 위해 쓴 글이면 읽고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특히나 한국 순문학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글이다. 그건 순문학 책의 뒤편의 추천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순문학 책의 뒤편에는 소설의 줄거리에 관한 설명이 없다. 나름 이름 있는 사람들이 "이 작가는 대단하다" "이 작품은 대단하다"라는 (근거도 거의 생략되거나 추상화되어 있다) 자신의 평가와 판단을 써놓을 뿐이다. 즉 이 책은 이러한 내용을 지녔고 이런 점에서 좋습니다 보다는 그냥 "좋다"에 가깝다. 독자가 스스로 읽고 판단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 셀럽들의 말에 "동조"하길 바라며 책의 뒤편을 채운다. 이게 참 독자를 기만하고 무시하는 행위인데 바뀌질 않는다. 순문학 독자들이 이 문학 셀럽들의 팬덤에 가깝다는 판단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추천"하고 "인증"하는 게 익숙하니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을 위한 글을 쓸 이유가 없다.
사실 읽는 사람을 위한 글을 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읽는 사람이란 (돈을 주지 않고 보는) 문학계 내부의 소수, 그중에서도 문예지의 편집 위원, 이름 있는 평론가, 편집자, 소설가, 지도 교수들인데 그들은 사실 너무나 동조화되어 있고 그리고 그들에게 잘 보여서 인정받고 싶은 것인데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글이 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소수라서 책을 사고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쓴다고 볼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순문학을 해서 먹고 사는가? 그것은 소수이다. 정확히는 순문학을 해서 먹고살 순 있다. 순문학을 써서 먹고사는 게 거의 불가능할 뿐이지. 이러니 거의 대부분의 순문학 작가들은 처음에는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이 있더라도 문예지 편집위원이나 문단의 눈치를 보며 쓰고 그러다 결국에는 자신이 쓰고 싶은 걸 쓰다가 문예지의 지면을 얻지 못하면 사라진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문단에서 도는 글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한 글이다. (이렇게 게토화 된 판에 세금은 왜 투입되어야 하는 거야. 보편적인 정신문화에 도움이 되고 있나? 아닌 거 같은데.)
이런 구조 속에서 태어난 글이 어떻겠는가. 한국 순문학은 기본적으로 "나"(화자와 작가는 거리가 가깝고 분리된 척하지만 제대로 분리한 작가는 거의 없다)의 모에화를 기반으로 한다. 일어난 사건에 "반응"만 할 뿐이다. (이런 글과 다른 글을 쓸 능력도 없어보인다. 소설 속에 보이는 디테일과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와 방식만 봐도 이제 자기 모에화말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얘기를 쓸 노력도 능력도 없는게 확실해보인다. 소위 문단의 픽을 봐도 그렇다.)
나는 언제나 안쓰럽고 안타깝고 애처롭고....(착하고)...(어쩔 수 없었고)...
내가 질려 버린 건 본질적으로 이런 이상함과 뒤틀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주고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공짜로 보는 사람들만 독자로 상정하는 뒤틀린 구조. 이런 구조를 지닌 글들이 소설만 그러겠나. 서점만 가면 한가득이다. 이제야 여기에서 벗어나면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앞으로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 어떤 글이 될진 고민을 좀 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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