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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휘 Mar 20. 2019

거울을 앞에 두고 말하기

"개념이 엄밀해야 한다." "중심이 확고해야 학문을 해나갈 수 있다."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어느 지역 도서관에서 개최한 강의였다. 그는 그 강의가 시작할 때쯤 해서 끝날 때까지 저 두문장을 반복했다. 저 두 문장이 그 강좌의 중심 주제였던 것 같다. 내가 왜 '같다'라고 말하냐면 강좌의 제목은 저것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던 저 두문장으로 돌아왔다.


내가 들으면서 의아했던 건 이 강의자가 개념을 엄밀하게 쓰고 있지도 않았고 중심이 확고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 합평을 하면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 유형이, 무엇의 유형이냐 하면 합평을 하는 방식의 유형이다.  이 유형은 사람의 개성에 기인한 차이도 있지만 보통은 합평에 대한 경험의 양과 소설을 써본 경험의 양에 따른 차이로 갈라진다.


합평을 할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소설이 예전보다 더 좋고 이대로만 쓰면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소설을 쓰리라, 혹은 이미 그런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그는 합평 대상이 되는 소설을 두고 이런저런 충고를 하는데 (대체로 장황하다.) 대부분 그가 소설을, 혹은 그 소설을 쓴 사람의 의도를 이해를 하지 못한 채 하는 말들이다. 간혹 옳은 말을 하는데(그런데 맞는 말을 하지만 지적한 부분을 이미 소설을 쓴 사람이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말은 자신의 소설에 적용되는 말이다.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다른 사람 소설을 봐도 그 부분만 보이는 거다.


난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이 이 합평 초보자이거나 들뜬 예술 초심자와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저 두문장 말고도 그가 새롭게 통찰해내고 발굴해냈다는 들뜬 투로 진부한 얘기를 하던  장면들을 떠올랐다. 아직(?)-그는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을 이 분야에서 보낸 사람이어서 맞지 않는 말이지만-어설픈 예술가여서 나온 언행 불일치가 아닐까 하는 추정은 확신이 되었다.


그를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 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두 번째 봤을 때 그가 말하는 비언어적 표현들, 그리고 수사법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확실함', '엄밀함'을 '강조'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반복해서 강조하면 엄밀하거나 확실해진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혹은 반복된 개념들은 엄밀하거나 확고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확실함', '엄밀함', '강조'는 다르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건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전에 이것들이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건 누군가가 지적해주거나,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이 개념들(?) 사이의 혼란은 현대적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결정론적인 근대를 거치면서 약화된다.) 이때 말하는 현대는 과거와 구분되는 과학기술사회의 세계를 뜻한다. 그래서 이 개념들을 직관적으로 구분해내는 것은 현대적 감각이다.


반복해서 일어난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감각은 현대에 이르러 다시 과학이 된다. 20세기 이르러 과학의 발달로 '완전히 결정론적인 세계'는 무너진다.  통계학을 통해 길들여진 우연이 과학이 된다. 이제 통계적으로 처리된 반복은 과학이 되고 엄밀함의 영역(P의 영역?!)에 들어간다. 이런 방식으로 구축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확실함'과 '엄밀함'과 '강조'를 직관적으로 겹쳐보게 된다. 하지만 반복되어 강하게 느껴진다고(강조) 해서 그것이 확실하거나 엄밀함에 포함되진 않는다. 어떤 반복인가에 따라 다르다. 다시 말해 적어도 통계적인 검증을 통과한 반복이어야 한다.


나는 (근대적인) 엄밀함과 확고함을 강조할수록 사고는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엄밀함과 확고함을 고수할 수 있는 영역에 관해서만 말하게 되거나, 아니면 엄밀하지 않은 것을 엄밀하다고 왜곡하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반복인가를 잘 따지는 문제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이전보다 힘들다. 지금의 세계는 자기의 메아리를 메아리가 되기 전의 소리와 구분할 수 없는 세계이다. 우리는 악의 없이도 우리의 말을 근거로 우리말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자가발전을 해버릴 수 있는 환경에 처해있다.

우리는 대부분 거울 앞에서 거울 안의 우리와 대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있는지 유리를 통해, 렌즈를 통해 그 건너를 보고 있는지 아는 건 쉽지 않은 시절이다. 우리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구분해내려면 우리는 무언가를 보기 전에 우리를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는"* 세계에 살아간다. 이런 세계에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반복'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고, 어떤 반복은 어떤 반복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어떤 반복이어야 하는가에서 비롯된 혼란은 계속해서 발명될 것이다. 과학기술은 시공간을 새롭게 창조해내고 우리의 시공간 감각을 바꾸고, 과거의 상상은 현재와 미래를 바꾸기도 하지만 이제 현재와 미래의 변화가 과거의 상상을 바꾸기도 한다.


거울 앞에 서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다, 거울에 비친 우리에게 우리는 말을 건다.

그리고 거울 속의 우리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러다 이제,

거울 밖의 우리는 울고 거울 안의 우리는 춤춘다.


*불확정성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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