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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휘 Mar 02. 2019

글-쓰기 신비주의자들

예전보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많다.

블로그가 등장하면서 누군가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페이스북이 등장하면서 모두가 글을 썼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출판을 꿈꾸며 글을 쓴다.


이는 에세이의 평균 질의 저하를 불러왔는데 이게 그전에 비해 나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글이 늘어나는 건 나쁜 게 아니다.


다만 수준 낮은 글들이 글의 수준과 상관없이 팔리면서 수준 낮은 글들만 소개되고 그런 글들이 강요?! 되는 게 문제지. 비평이 힘을 잃고 큐레이션을 서점이 포기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사람들은 이제 좋은 글을 소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하거나 뻔한 글을 소비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의 글을 소비하고 싶어 한다. 


나는 몇 년 전부터는 새롭게 좋아하게 된 에세이스트가 없다.


에세이는 쉬운 장르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에세이는 작가가 전면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에세이가 고유의 스타일을 획득하려면 작가가 매력적이어야 한다. 매력적인 사람이 매력적인 시선을 담아 능숙하게 문장으로 써 내려갈 때 좋은 에세이가 된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새로운 사유가 문장에 담겨서 나와야 한다.  새로운 사유를 담아내는 글은 언제나 속도전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고유성을 잃고 잊힌다.


그럼, 좋지 않은 에세이는 어떻게 쓰이는가? 다른 글들의 복제품이다. 의도적으로 하든 순진한 방식으로 하든 그러하다. 이미 누군가가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써놓은 것들을 그대로 자신의 에세이에 가져다 쓴다. 확신범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범죄는 빼고 순진한 방식으로 다른 글들을 복제하는 경우만 따져보자. 순진한 표절은 자주 일어난다. 이는 순진하기 때문이고(자신의 생각일까 의심하지 않는다) 또 게으르기 때문이며(혹시 다른 데서 본 게 아닐까 찾아보지 않는다) 그저 좋아요가 좋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글쓰기 충고랍시고 "많이 읽고 많이 쓰세요."만 한 사람들의 탓도 크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읽고 많이 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충고가 글쓰기가 자연발생적인 무언가 혹은 도를 닦는 행위처럼 신비한(심지어 도를 닦을 때도, 경전이나 비급이나 있지 않나?) 무언가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많이 읽고 많이 쓰게 되는 게 아니라, 아 별다른 방법이 없고 그냥 쓰면 그걸로 되는가 보다 하게 되며 실제로 글을 쓸 때 지켜야 할 규칙과 형식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유 기술로 쓰게 된다. 결국 글 안에서 비대한 자아가 춤추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비대한 자아 없이 글쓰기가 발생하기 힘들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비대한 자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노력이 없었는데 비대한 자아가 절제되고 정제될 가능성은 없다.


그럼, "많이 읽고 많이 쓰세요."라고만 충고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런 사람들의 왜 이런 충고를 하는 것일까. 


일단 귀찮아서 그런 것일 수 있다. 글쓰기는 장르마다 고유한(혹은 일반적인) 형식과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서, 영화 시나리오의 경우 일반적으로 3막 구성이고, 1:2:1의 분량으로 배분된다. 에세이의 경우도 플롯 포인트가 목적에 따라 언제 나오는지도 대충은 정해진다. 이런 규칙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무작정 "많이 읽고 많이 쓰세요." 하는 건, 이 충고가 가장 쉬운 충고 이기 때문이다. 이런 충고를 들으면 더 이상 물 게 없다. 고작 해봐야 얼마나 읽고 얼마나 써야 하나요? 정도다.


두 번째는- 이게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글쓰기는 가르칠 수 없다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글쓰기는 배울 수 있는가?라는 대답에는 한 가지 답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글쓰기를 배울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의 문장이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이 읽고 많이 쓰세요."라는 충고를 하고 마는 이들은 이 두문장-글쓰기를 배울 수 있게 할 수 있다,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다-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글쓰기에 대한 충고를 구할 만큼 좋은 글쓰기 실력을 지녔다고 "자신"하며 이를 좋아하고, 자신들이 갖춘 글쓰기 실력을 "신비롭게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비대한 자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들의 글이 좋을까? 좋을 수도 있다. 비대한 자아가 들어찬 글도 이따금 좋다. 그러려면 작가 자체가 매력적이어야 한다. 이런 작가들은 자신들의 매력을 쏟아붓고 자가 복제하다 지루한 글을 쓴다. 그러나 대부분은 애초부터 읽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글을 쓴다.


위의 경우와 아예 상관없이 매번 꾸준히 좋은 글을 써내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글쓰기의 패턴을 무의식에 새겨 넣을 정도로 훈련되어서 자신의 글쓰기 과정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로 글을 쓴다. 이 경우 글쓴이가 글쓰기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면 자신은 좋은 글을 쓰면서도 글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거다. 


세 번째도 있는데, 알려주기 싫어서 저런 충고를 하는 경우다. "많이 읽고 많이 쓰세요." 따위의 충고만 들으며 글을 계속 쓰고, 연구하고 예전보다 좋은 글을 쓰게 되었고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을 몇 가지 알게 되었을 때, 쉽게 알려주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에세이야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좋은데, 만약에 소설이나 서사 장르 혹은 시라면 자신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이미 갖춘 게 아닐 경우, 경쟁자 하나 더 늘리는 게 자신에게 좋을 리 없다. 


고유한 문체(Style)는 획득하려면 오랜 시간의 연구와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매력적이고 고유한 문체를 획득하는 사람은 드물다. 고유한 문체를 가르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괜찮은 문체는 익히게 할 수 있고,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가르치는 건 가능하다. 


뭐 글을 잘 쓰는 사람이어야 가능하겠지만. 


*이 글은 자동-기술로 쓰였다. 글이 별로라면 다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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