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지 Feb 02. 2023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그때의 감정 그날의 행복들은 시간이 지나면 잔상으로 남는다. 기록하지 않으면 곧 증발되어 막연한 감정만이 남을 뿐이다. 대체로 요즘의 나는 지금의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거나, 브런치에 육아를 쓴다. 첫째 서빈이를 임신했던 2020년의 나는 가끔 일기를 썼는데, 새로운 예쁜 종이가 생기면 다시 옮겨 쓰는 바람에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장난감방 한구석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과 쓰다 만 오랜 다이어리들을 정리하다가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잠깐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2020년 04월 08일 수요일

오늘도 날씨가 무척 좋았다. 다시 조금 추워진다고 해도 그것은 시원한 봄바람 정도일 것이다. 5월이 되면 낮에는 좀 덥다 싶겠지. 맨다리를 드러내도 답답하지 않을 거다. 저녁엔 카디건 하나 걸치고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손난로 마냥 잡고 걷는 커플들이 종종 보이겠지.

2월에만 해도 똥배인지, 아기 배인지 알 수 없던 나의 배가 어느새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커졌다. 가슴보다 더 많이 나온 것은 진작이고 이제 윗배에도 탱탱볼 같은 아기집의 촉감이 느껴진다. 오늘 퇴근 후 옷을 갈아입다가 '내 배가 언제 이렇게 나왔지?' 하고 거울을 보며 감탄했다. 살이 쪄서 뱃살이 나왔을 때는 느낄 수 없던 으쓱하는 마음이 든다. 스스로가 멋지기도 하다가 또 막연히 두렵기도 하다.


2020년 04월 12일 일요일

바람소리가 거세다. 이따금씩 창문이 흔들려서 창문 밖을 보니 꽃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위태위태하다. 나는 조리원 예약을 하러 가려던 약속을 취소했다. 왠지 퍼지는 날 거센 바람은 좋은 핑계였다. ... 피부가 뒤집어지고 까맣고 퉁퉁 부어서 속상하다. 못난이 감자 같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머리 가르마를 이리저리 바꿔보다가 이내 우울해진다. 손도 붓고 발도 붓고 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 듯하다. 내일은 점심시간에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고 좀 걸어야겠다.


2020년 07월 29일 수요일

사랑하는 우리 두루. 엄마는 두루랑 뱃속에서 함께 한 열 달이 꿈만 같아. 두루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무척 기대가 돼. 오늘도 두루는 엄마 뱃속에서 열심히 놀고 있네. 작게만 느껴지던 너의 존재감이 이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매 순간 다가온단다.


20년 10월 05일 월요일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침이다. 아이와 남편은 각자의 방에서 잠을 자고 난 밤새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한다. 빨래를 돌리고 국화차를 우려낸다. 오늘은 날씨가 제법 차다. 아이에게 자기 전에는 따뜻한 옷을 입혀야겠다. 새벽 싸늘한 공기에 우리 아이가 춥지 않기를. 남편의 가을 옷도 다시 옷걸이에 걸어야겠다. 일을 쉬며 온전히 엄마가 되어서 아침을 맞이하고 여유 있는 이 시간이 나는 참 좋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오전의 한가로움.


그때 남겨 둔 일기들을 읽고 처음의 나는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그때의 일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왈칵 알 수 없는 게 터져 나왔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묘한 감정을 추슬렀다.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숭고하고 가슴 벅찬 기간이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아이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하며 가슴 떨려하고 있었는지는 잊어버렸다.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글로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일기 속에는 담백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때로는 너무 적나라해서 보여주기 부끄러운 부분도 많았다. 아무 가식 없이 써 내려간 구어체의 문장들은 차마 공개하기도 힘들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의 감정을 덜어낸 채 사랑하는 대상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훗날 서빈이와 나희가 읽을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곰살맞은 그때의 그 사건들을 조금씩 글로 남겨놓고 있는데, 쓰다 보면 우리 아이의 모습을 실제보다 더 귀엽게 표현하고 있을 때가 있다. 이 글이 진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일까. 나는 망설인다. 그 기록들이 먼 나중에 보았을 때 2020년의 일기장처럼 울림을 주는 글로 남을 수 있을까. 너무 가식적이거나 인위적인 글들로만 남지 않을까.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절제해야 하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 사람의 귀여움에 대해 담백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애정일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70일 만에 자매가 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