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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Sep 30. 2016

딱 한 잔만 마셔야 한다면

[酒目하다] 카구아 맥주

가끔 디오니소스에게 의탁해 몸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그런 충동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 내 간은 알코올 분해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기에 그렇게 싶은 대로 해버렸다간 며칠을 고생할지 모른다. 술을 진탕 마시기 전에 겁부터 나고 더 이상 무모해질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렸다. 노화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늙으면 놀지 말고 쉬어야 한다.


5년 전 “마시자, 마시자, 술을 마시자. 마시자, 마시자. 혼자서라도. 오늘 밤의 굴욕은 잊을 수 없어. 술은 잔뜩 마시고 잠들어야지!‘ 이딴 노래를 지어서 율동까지 곁들이면 술을 아낌없이 퍼마시는 삶도 살았건만 이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때 이미 혼술의 여왕. 정점을 찍고 이젠 왕좌를 내려온 느낌이다. 의사 선생님도 음주는 일주일에 딱 1회만 허용해주는 판국이니까.


혈중 알코올 농도가 낮아질 때마다 몸에서는 술을 찾느라 요동쳤지만 고통 속에서도 잘 버텨내고 있지만 엉망진창으로 취하는 것만이 술을 마시는 목적이 아니므로, 술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맛. 그리고 새로 나오는 술을 맛보고 싶은 간절함이 가득해지기도 한다. 양을 채울 수 없다면 질로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그런 마음. 정말 맛있는 술을 딱 한 잔만 하면 될 것 같은. 술 한 잔이라는 엄청난 유혹에 시달리던 그런 오후였다.


때마침 친구가 보틀 샵에 들러 맥주를 사 가지고 왔다며 함께 한 잔 하자고 했다. 얼마 전에도 딱 한 잔의 술이 너무 간절하여 친구와 함께 찾아간 바에서 아이리시 위스키 제임슨을 시켰다. 피트함을 좋아하는 내게 딱 맞는 취향은 아니었지만 선택권이 없어서 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내게는 너무 부드럽고 깔끔해서 술 마신 것 같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쉬웠지만 한 잔만 마시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깰 수 없어 같이 간 친구가 두 병째 맥주를 마시는 동안 바에 놓여 있는 술 홍보 카탈로그나 볼 수밖에 없었다. 병 모양이 무척이나 독특한 맥주가 눈에 띄었다. 맥주 치고는 고급스러운 병 디자인과 동양적인 면모를 뽐내는 독특한 라벨이 눈에 띄었는데 그 안에 적힌 한자를 보니 馨(꽃다울 형)과 和(화할 화), 꽃 같은 상태가 되다 혹은 향기로워지다 같은 의미를 담운 ‘카구아’라는 이름을 가진 맥주였다.


첫인상은 맥주라기보다는 와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블랑(화이트)과 루즈(레드) 두 가지 콘셉트로 출시된 탓도 컸다. 이 맥주와 마리아주해 놓은 추천 음식들과 와인의 분류와 비슷했다. 마셔보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미 한 잔의 술을 마셨기에 눈으로 그 녀석을 새겨 넣었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친구가 카구아 블랑을 사 가지고 온 것이었다. 카쿠아 루즈가 아닌 블랑을 선택해서 같이 마시자는 제안을 해주다니. 너무나 취향저격인 것이다. 원산지가 벨기에로 표기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병 디자인만 일본에 의뢰한 것인 줄 알았는데 2011년 도쿄 인근에 사는 4명의 아저씨가 의기투합해서 크래프트 맥주 회사가 벨기에 브루어리에 의뢰해서 만든 OEM 방식의 맥주였다.


카구아라는 이름값을 하듯 향기가 무척 깊은 맥주였다. 맥주가 담긴 잔에 코를 들이밀면 화악하고 향이 밀려올라 왔다. 맛을 보니 밀맥주에 첨가되곤 하는 시트러스 계열의 상큼함 속에 결코 가볍지 않은 맛이 느껴졌다. 자몽이나 오렌지가 아닌 유자 껍질을 썼다는 점, 고수 가루와 산초도 첨가했다는 점이 동양적인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맥주의 패키지 디자인부터 맛까지 이 맥주가 추구하는 확실한 콘셉트를 보여주고 있었다.





카구아는 알코올 도수가 블랑이 8%, 루즈가 9%이며 맥아가 67% 이상 들어간 분명한 맥주이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유자가 첨가되어 있어서 발포주로 분류되어 판매되고 있는 것도 특이점이다.


보틀 샵에서 구매하지 않는 이상 제법 고가의 맥주라서 가성비를 따져본다면 다른 괜찮은 밀맥주가 많으니 꼭 마셔봐야 한다고 추천하기는 그렇지만 잘 차려진 음식과 함께 격식 있는 자리에서 곁들이고 싶은 맥주랄까나. 그런 고급스러움을 잘 갖춘 맥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림 . ㄱ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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