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導하다] 국산 맥주
“한 병 시켜도 될까요?”
M은 종종 음식이 나온 뒤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지극히 개인주의자들이었고 설령 묻지 않고 한 병을 시켜 혼자서 다 비워버린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깍듯하고 사회화가 잘 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동을 먹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우동에 곁들여 나오는 밀가루를 입혀 고소하고 노릇하게 잘 튀겨진 각종 튀김을 먹기 위해서인지 어느 한쪽에 우위를 둘 수 없는 메뉴를 시켜놓고 마주 앉아있었다. 맥주가 마시고 싶어 지는 건 당연했다.
“CASS 한 병 주세요.”
M이 술을 주문했다.
“이거 좋아하시나 봐요?”
맥주를 가져다주며 가게 주인이 아는 체 하며 물었다.
“전에도 CASS 마셨어요?”
나도 M에게 물었다.
“혼자 와서 먹으면서 한 잔 했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술을 마시기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만두를 먹으면서, 마파두부를 먹으면서, 튀긴 닭을 먹으면서, 혹은 영혼을 정화해주는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딱 한 병. 한 병으로 나눠 마시는 날도 있었고 각자 한 병이거나 각자 한 캔인 날도 있었지만 병을 쌓아둔 채 진탕 마시는 일은 없었다.
M과 나는 과거의 어느 시점, 서로가 연결된 적이 없었던 어떤 날에는 지나치게 술을 마시기도 했었다. 평생 마실 술이 정해져 있다면 그때 이미 다 마셔버린 그런 시간을 보내고 마주했다. 술을 한 병 시키면서도 둘은 항상 입버릇처럼 금주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맥주가 술이냐며 적당히 타협을 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다음 날 숙취 때문에 화장실에 쓰러져서 변기를 붙잡고 있는 일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있었지만 (M도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M은 감기에 걸려도, 술병이 나도 표가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나와는 달리 엄살을 부리지 않았고 문명인의 얼굴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 둘이서 그렇게 마신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서로의 취함을 굳이 견뎌야 할 이유도 없었고, 취함을 핑계로 털어놓아야 할 이야기가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진상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이, 그 거리감 덕분에 큰 문제없이 둘 사이를 유지되고 있었다. 술의 기운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느 선까지는 기꺼이 솔직해졌고 그 솔직함 자체도 M은 내가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럼에도 듣는 걸 어려워하진 않았다. 누군가의 대나무 숲이 된다고 해서 그 말을 공기에 머물게 해 간직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잘 흘려보냈고 오히려 정성스럽게 듣지 않는 점에서 M의 주변인들이 M에게 조잘조잘 뭐든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M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만 걸러 듣고 걸러 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M 안에 남아 수집되는 것들은 추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형편없는 것은 없었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는 것. 나는 그것이 편하고 좋은 관계에서도 잊어서는 안 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게 화장기 없는 얼굴이나 편한 옷차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편한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는 것. 안락한 사이에서 자기 고집만을 앞세우지 않는 걸 의미한다. 싫고 좋음을 분명히 하더라도 상대에게 피로감을 안겨줄 정도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M과 나는 맥주 취향이 확실히 달랐는데, 내가 밀 맥주와 에일 맥주를 좋아한다면 M은 라거 파였다. 특히 싱거움이 주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국산 라거 맥주를 좋아했다. 보틀 샵에서 한정판 혹은 신상 맥주를 골라 맛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아아, 그래도 나는 라거가 제일 좋아.”
라고 나른하게 말하는 타입이었다.
맥주 자체에만 집중해서 오롯이 맥주가 가진 향과 맛을 즐기겠다면 안주 없이 에일 맥주를 마시며 각각의 맥주가 가진 특색을 혀와 마음에 새기겠지만 반주를 하는 데는 라거도 나쁘지 않았다. 음식을 잘 넘길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항상 뭔가 먹으면서 한 잔씩 하곤 했으니 라거는 좋은 선택이었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한 잔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맥주를 사들고 M을 찾아가면 반겨줄 것도 안다. 편의점에는 네 캔에 만 원, 세계맥주 대세일 중이지만 M과 마신다면 역시 국산 맥주를 고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