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Jun 16. 2023

인형 회고

하늘색 팬더곰에서 부터 시작된 회고

침실 속 선반에는 하늘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팬더곰 인형이 있다. 소 작아 보이는 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는 둥글둥글한, 12살 때 에버랜드 기념품 가게에서 데려온 녀석. 하루종일 놀이기구를 타고, 뛰고, 달콤한 솜사탕을 먹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주차장으로 향하기 전 들 기념품 샵에서 만난 곰인형. 사춘기가 살짝 와 새침해졌을 무렵이었음에도 나는 이걸 사달라며 아기처럼 졸랐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살 때면 늘 엄격했던 엄마와 아빠는 그날따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의 엉덩이에 달려있던 가격택을 떼 비로소 마음 편히 품 안에 안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내 성장기엔 항상 여러 인형들이 함께했다. 하지만 팬더곰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탓이었을까. 성인이 된 이후에도 녀석은 내 침대 한편을 지키다가 결혼 후 신혼집 침실까지 차지했다. 지금은 남편도 어울리지 않게 이 녀석을 종종 껴안고 있는다. 이십여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팬더곰. '너와의 첫 만남엔 나도 말랑한 아이였는데 넌 여전히 귀엽고 난 조금씩 탄력을 잃어가고 있구나' 싶다.


지금은 굳이 사비로 인형을 사지 않는다. 인형이란 그저 솜뭉치에 불과하며 쌓아둬 봤자 결국 짐만 되고, 주기적으로 목욕(욕조는 세탁기)도 시켜줘야 하므로 귀찮다. 실용적이지 않고 그저 외모에만 충실한 것들. 소품샵에서 폭신한 인형들을 발견하면 귀엽긴 하지만 차라리 이 돈으로 화장품을 사고, 생필품을 사는 게 이득이라 생각한다. 합리적인 사고를 우선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서른 중반의 내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지다가도 가끔은 낯설다.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하늘색 팬더곰을 껴안고 있다 보니 생애 첫 애착인형이 떠오른다. 술이 통통하던 똘똘이. 최근 대형마트에 갔다가 똑같은 이름의, 하지만 다양한 콘셉트를 지닌 똘똘이들을 보고 아직도 이 녀석의 명성은 여전하구나 싶어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비록 나와 함께 놀던 똘똘이 인형보다 한껏 더 세련되어 귀여움이 덜하긴 했지만. 아무리 입술에 대주어도 우유가 줄지 않던 우유병을 가지고 있던, 연분홍색 내의를 입고 있는 나의 똘똘이의 포동 하게 부푼 볼살이 떠오른다. 네 살 정도쯤 아빠 고향에 방문했다가 근처 문방구에서 데려왔다던 그 아이는 나의 순수하고 말랑한 손길을 거쳐 형광펜으로 아이섀도를 발라주고 빨간 사인펜으로 입술을 그어놓던 거친 손까지 경험했다. 어느 날은 머리를 잘라주겠다며 핑킹가위로 쑥대밭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우윳빛의 귀여운 금발머리 똘똘이는 어느 순간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다가 서서히 내 관심 속에서 사라졌다.


똘똘이 외에도 푸우, 뿌까, 텔레토비 뚜비, 엽기토끼 등 다양한 인형들이 어린 내 주위에 항상 있었다. 동생과 함께 소파를 밀고 뒤에 들어가 인형극 놀이를 하기도 했고, 양한 외형을 지닌 솜뭉치들을 화이트보드 앞에 앉혀두고 말도 안 되는 논리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선생님 놀이를 하기도 했다.


친구와 싸우거나, 혼이 나 속상할 땐 그 말랑한 것들을 안고 눈물을 쏟아내다가 푹신한 감촉에 위로받기도 했고 비밀을 속삭이기도 했다. 감정이 널뛰  어린이의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오롯이 다 받아준 그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해본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어린 나의 여러 나날을 함께 보냈던 수많은 인형들을 떠올리다 보니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었던 맑은 감정과 순간들 문득 떠오른다. 인형들과 함께 정신없이 놀다가 들리던 엄마와 아빠의 밥 먹으라 외치는 젊은 목소리. 니 인형이네 내 인형이네 싸우다가도 금세 색연필로 쓴 삐뚤빼뚤 사과 편지를 들고 오던 하얀 찹쌀떡 같던 어린 동생의 얼굴. 뭘 하고 놀든지 그저 흐뭇하 바라할머니의 뽀글 파마머리도.


내 곁을 스쳐간 인형들을 하나씩 추억하다가 팬더곰을 자세히 바라본다. 가끔 목욕을 시킨 결과 살짝 세월느껴지지만 여전히 뽀송한 팬더곰. (특히 얘는 특별히 아껴 세탁기에 돌리지 않고 욕조에서 목욕을 시키기도 했었다)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볼록하고 푹신한 하얀 뱃살, 이걸 꾹꾹 눌러보다 보면 현실의 냉담함 속에 굳어있던 마음이 말캉말캉해지는 것 같다.


삭막해진 내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면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하늘색 팬더곰의 폭신 말랑한 뱃살을 자만져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곳에 가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