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Jun 22. 2023

한약, 마지막 한 방울을 대하는 자세

달지만 쓰구나

최근 기력이 약해지며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인한 불편함을 몸소 경험했다. 예전 같으면 이러다 말겠지 하며 넘겼겠지만 내 마음 같지 않은 게 내 몸이라는 걸 깨닫고 십여 년 만에 한의원에 방문했다.


어린 시절 또래 보다 체구가 작고 약했던 탓에 주기적으로 한약을 먹었다. 그때는 한약의 쓴 향을 맡기만 해도 구토를 할 정도로 싫었다. 그래서 한약을 입에 넣고 몰래 뱉어버리기도 했고 반정도만 마신 뒤 다 마셨다며 한약이 남아있는 팩을 쓰레기통에 숨기 듯 버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등짝 좀 맞아야겠다) 내 어설픈 연기를 금세 눈치챈 엄마캐릭터가 그려진 예쁜 머그잔에 한약을 덜어낸 뒤 "코코아라고 생각해. 코코아" 라며 최면을 걸었다. "쭉~~ 쭉, 그렇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셔야지?" 가짜 눈물을 질질 짜내며 두 눈 질끈 감고 목구멍으로 쓰디쓴 것을 힘겹게 넘기곤 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셔야 한다는 압박감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한약을 다 마신 뒤에는 즉각적으로 사탕을 앙 물었다. 하지만 쓴맛에 가려 단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비실비실한 어린이었던 나는 큰 병치레 없 건강한 어른이 되었다. 종종 저질 체력을 체감하긴 했지만. 십여 년 전. 잦은 야근으로 인해 체력이 약해지며 이곳저곳 건강에 적신호가 생겼다. 그때도 엄마는 좋다는 한의원을 알아내 한약을 지어주셨다. 여전히 인상을 팍 쓰며 힘겹게 쓴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한약과 나의 인연은 잠시 끊겼다. 그 이후로 영양제도 잘 챙겨 먹고 운동도 규칙적하고 술도 자주 마시지 않는 등. 꾸준히 건강을 챙겼다. 건강 상태에 대해선 자신만만했으나 타고나길 약했던 일부 장기들의 문제는 달랐다. 건강이 쇠해지니 부정적인 생각이 자주 떠올랐고 의욕도 없었다. 이렇게 진 빠진 듯 살면 안 되겠다. 평생 데리고 살 내 몸에 투자 좀 해줘야겠다 싶어 호기롭게 한의원에 방문했던 것이다. 


한약 가격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 '건강에 투자 좀 하지 뭐'라며 기세 등등 하게 펴져있던 어깨가 살짝 굽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드를 내밀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며칠 뒤 한약이 도착했다. 내 돈 주고 처음 사 먹는 한약이었기에 포장박스부터 소중하게 뜯었다. 복용방법과 주의사항도 꼼꼼하게 읽었다. 예전 같으면 먹지 말라는 음식 리스트를 대충 쓱 훑어본 뒤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약속 도중 들린 카페에서 카페인이 없는 따듯한 차를 주문했다.


한약을 따듯하게 데운 뒤 팩을 개봉해 머그잔에 곱게 따른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서. 그리고 따듯한 그 액체를 호로록 마신다. 혀가 마비될 것 같이 쓰던 것이 달다. 녹색빛과 검정 빛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 액체는 내 기억 속 쓰디쓴 것이 분명 맞는데. 평상시 마시던 아메리카노 보다 쓰지 않았다. 한약 한 방울을 혀에 대기도 싫어 발 버둥치던 작은 사람이 어느새 한 방울이라도 남길까 싶어 끝까지 살펴 마시는 큰 사람이 된 것이었다. 쓴 맛을 달래기 위한 사탕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쓴맛을 많이 봤기에 덜 쓰게 느껴지는 걸까. 혹은 회복에 대한 간절함이 쓴맛을 잊게 만든 걸까.


하지만 새로운 쓴 맛을 봤으니 바로 급격하게 늘어있는 카드 결제 대금. 과거의 쓴 맛 극복했다며 의기양양했는데 새로운 쓴 맛이 명치를 세게 쳤다. 비싼 액체를 가차 없이 뱉어버리던 어린 나를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썼을까. 코코아 최면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이것은 그저 숫자일 뿐이다' 라며 숫자에 의미를 더하지 않는 새로운 자가 최면을 걸어본다. 마지막 검푸른 한 방울에 더 집착하며.




[이미지 출처 : 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인형 회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