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세이
어렸을 적에는 ‘절교’라는 말이 ‘호환마마(虎患媽媽)’보다 무서웠고, 어른이 돼서는 ‘절교’라는 말이 안타깝습니다.
어릴 때 누나와 싸울 때면, “이제부터 절교야”라는 말에 저는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누군가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제게 너무나도 큰 상처였나 봅니다. 이럴 때면 “누나야 미안해”라고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누나는 제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누나를 무시했으면 됐을 텐데, 그때 저는 ‘절교’라는 말이 ‘호환마마’보다 무서웠습니다.
왜 ‘절교’라는 단어를 제가 두려워했는지에 대해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누나와 못 놀아서?’ 아니면 ‘시골이라서 놀 사람이 없어서?’, ‘제 마음이 약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이유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 당시 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단어 ‘절교’. 사전적인 의미로 ‘서로의 교제를 끊음’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한 마디로, 이제부터 만나지도, 말하지도 말자는 것입니다.
조금 나이가 지나서는 가끔 가족끼리 한동안 ‘절교’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참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여전히 철없는 남매들입니다. (저는 4남매 중 막내입니다.) 가장 이런 사태를 많이 일으키는 원인이 ‘논쟁’입니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로 만든다? 밀로도 만든다? 이런 식의 논쟁이 생기면서 싸우게 됩니다. 예전에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전화하거나 인터넷 검색하면서 정답을 맞혔습니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바로 정답을 알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맥주를 보리로 만들든, 밀로 만들든 그게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논쟁에서 정답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논쟁을 펼치면서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서 논쟁이 다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절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건 과거에나 현재나 우리 집안에서 하나의 ‘유행(?)’이 됐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논쟁을 하지 말라.’ 즉, 논쟁은 정말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간혹 상대방이 실수한 말에 대해 정정해주고 싶겠지만 참아야만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를 소크라테스가 말했는지, 괴테가 말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기애애한 술자리에서 친구가 잘못된 정보를 말했다고 해서 “그게 아니야”라고 말하면 그 술자리는 우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친구가 실수한 말을 정정해주고 싶으면 나중에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내가 찾아봤는데, 그 말은 소크라테스가 했더라”라고 말하면, 친구도 “아 그래”라고 훈훈하게 넘어갈 것입니다. 저희 남매들도 쓸데없는 논쟁을 하지 않았다면, 서로의 아킬레스건이 되는 약점을 건들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절교’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도 모르게 쓸데없이 주장했다가 누군가에게 ‘절교’를 당한 적이 있지 않을까? 카네기 ‘인간관계론’에 나온 ‘논쟁을 피하라’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은 채 말입니다. 가족은 ‘절교’라는 말을 하겠지만, 주변 사람은 그런 말도 없이 상대방과 ‘절교’를 할 것입니다. 참, 안타깝게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