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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31. 2024

중세 도시 프로뱅

36.Provins






프랑스 남쪽 도시 엑상 프로방스를 연상시키는 이름, 프로뱅(provins)은 2001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중세마을로 샴페인으로 유명한 샹파뉴와 인접한 곳입니다.

일드 프랑스 중 나비고 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가장 먼 지역으로 파리 동역에서 기차로 약 1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매력 있는 소도시죠.  



파리 동역
파리 동역



8시 47분 기차는 40분이나 딜레이 되어 9시 30분에 출발했어요.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으니 문제없습니다.

차창으로 동영상처럼 풍경이 지나갑니다.

추수가 끝나고 텅 빈 들판 위에 농가들이 하나둘 서 있고 나무들도 줄지어 따라갑니다.

감탄사가 나오는 기막힌 풍경은 아니지만 한적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편했습니다.

목표나 기대치 없이 나선 여정이기에 더 그랬을 겁니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이 덜해지고 마음이 무뎌지는 건 어찌 보면 감사한 일입니다.

더 이상 애면글면 날을 세우며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요.

스마트폰으로 먼 곳의 농가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얼룩이 묻은 유리창을 통과하고 기차의 흔들림을 이겨낸 카메라 렌즈는 흐릿한 실루엣을 그려냈습니다.

그림 같은 질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프로뱅 가는 길



  

그런데 중간쯤 갔을까?

기차에서 안내 방송이 나오더니 사람들이 하나둘 띄엄띄엄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Longueville 롱그빌(Longueville)이라는 작은 역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연착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며 혼자 앉아있었지요.

그때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프로뱅에 가느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하니 본인을 따라오라는 겁니다.

그는 역의 지하 통로를 지나 건너편 플랫폼으로 안내하고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기차를 타면 된다고 알려주더군요.

복장으로 보아 역무원도 아닌 그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롱그빌에서 30분쯤 기다리니 프로뱅으로 가는 기차가 왔습니다.

숙소를 떠난 지 약 4시간 만에 프로뱅에 도착했지요.

오느라 수고했어하는 위로처럼 햇빛이 짜잔 하고 나타났습니다.



롱빌 역
롱 빌
프로뱅 역



작은 도시라 그냥 길 따라 쭉 걸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은 알자스 지방에서 흔히 보았던 꼴롱바주 양식의 집들이 많더군요.

콜롱바주(Colombage)는 나무로 기둥과 틀을 세운 뒤 그 사이 벽돌을 채우고 진흙을 발라 만든 건축물을 말하는데요.

스트라스부르나 꼴마르처럼 독일에 인접한 마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집의 형태입니다.



      






프로뱅은 샹파뉴 백작 가문의 영지였습니다.

우리가 샴페인이라고 부르는 스파클링 와인은 샹파뉴 백작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샴페인은 여자가 마셔도 아름다워 보이는 유일한 술이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탄산가스의 시원함과 발효를 통하여 얻어지는 포도의 깊은 맛, 숙성으로 얻어지는 다양한 자연의 향기를 음미하는 황금빛 술, 샴페인은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45 킬로미터 떨어진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발포성 포도주입니다.

프로뱅도 샹파뉴 지역이지요.    

 

최상위 급에 속하는 '콩트 드 상파뉴'는 떼땅저(상파뉴 지역의 한 마을)의 샴페인입니다.     

콩트 드 상파뉴는 상파뉴 백작을 뜻하는데요.

샤르도네 품종의 포도 묘목을 이곳으로 처음 가져갔다는 상파뉴 백작 티보 4세를 기념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랑크뤼(최고급 포도원을 뜻함)에서 최고 품질의 포도가 수확되는 해에만 만들어지며 섬세한 뀌베(포도 알을 첫 번째 압착해 얻은 가장 좋은 포도즙으로 발효해 만든 최고급 샴페인)이기 때문에 생산량이 적은 희귀한 샴페인이라고 해요.    

그런데 와인의 마개로 쓰는 코르크는 샴페인 때문이랍니다.               

과거 수도원에서 만들던 샴페인은 일단 포도를 수확한 후 1차 발효를 시키고, 그다음에 병에 담아 다음 봄까지 2차 발효를 시키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합니다.     

2차 발효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거품이 생겨 기포가 올라오게 되는데 이를 보관하기 위해 샴페인의 압력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병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코르크 마개가 발명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나무를 깎아서 기름 먹인 헝겊으로 싸서 병을 틀어막았는데 제대로 밀봉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지요.         

마셔보지는 못했지만 샴페인 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고급 제품이 프랑스의 돔 페리뇽이죠. 

돔 페리뇽은 17세기말의 수도사로 샴페인의 코르크 마개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코르크 마개는 남유럽에서 산출되는 너도밤나무과의 코르크참나무로 만든 것을 최고로 핀다고 하네요.     




돔 페리뇽 신부
샴페인 돔 페리뇽



책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중세 유럽의 작위들은 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등급은 낮은 것부터 나열하면 기사,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프린스의 7단계로 나뉘는데요.


공작(Duke) - 로마 시대에는 지방 군대의 지휘관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로마 멸망 후 프랑크 왕국에서 넓은 영토를 가진 사회적 지도자     

후작(Marquess) - 국경지대의 봉토를 소유한 귀족.     

백작(Count) - 로마시대 코메스는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관리였으며, 프랑크 왕국에서는 지방사령관을 의미

자작(Viscount) - 본래 백작(count)의 보좌관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프랑크 왕국의 자작은 백작의 대리인이나 부관으로 백작 대신 영지를 관리하는 사람    

남작(Baron) - 프랑크 왕국에서 자유민을 의미하던 단어 baro에서 나왔으며 큰 땅을 소유한 영지를 남작령(barony)라고 불렀는데 그 땅 주인이 귀족일 때 남작(baron)이라 불렀음.








걷다 보니 생 키리아스 성당이 보였습니다.

1032년 성인 키리아스를 위해 건립된 곳이라는데 오랜 세월을 견뎌온 만큼 건축의 형태가 묵직하고 둔탁했지요.

내부 역시 별다른 특징 없이 소박했습니다.

성당메서 나오니 해가 뜬 채로 소나기가 흩뿌리기에 잠시 기다리니 그치더군요.












프로뱅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세자르 타워입니다.

입장료가 4.3유로라 10유로를 건네니 거스름 돈이 없다며 카드로 구입하라고 하더군요.

생 키리아스 성당에서 마주 보이는 세자르 타워는 프로뱅 역사의 중심으로 망루, 피난처, 감옥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12세기 후반 샴페인 백작 앙리 1세의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무렵 프로뱅은 매우 번영했고 파리와 루앙에 이어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고 합니다.

프로뱅 전체의 멋진 전망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탑의 내부로 들어가니 별 다른 게 없는 데다가 어두컴컴하고 방문객은 오직 나 혼자여서 조금 으스스했지요.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목골가옥이 즐비한 프로뱅은 정원마다 유난히 장미꽃이 많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한 후 샹파뉴 백작이 동방에서 붉은 장미를 가져와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하는데, 약제의 냄새와 쓴맛을 중화시키는 용도로 장미가 사용되면서 프로뱅에 부를 가져다주었다고 해요.






한적한 광장 벤치에 앉았습니다.

근처에 젤라토 가게가 있었는데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여행자들이 없어서인지 영업을 하지 않는 레스토랑들이 대부분이었고 크레페를 파는 식당만 문을 열었더군요.

크레페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점심 대신 간식으로 가져온 애플파이를 먹었지요.

햇살은 따사롭고 주변은 고요했습니다.

세월을 거슬러온 듯한 마을 광장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아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나는 그런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걷다 보니 성벽에 다다랐습니다.

생장이라는 이름의 성문 근처에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요.

성벽을 따라 잠시 걸었습니다.

마침 근처에 버스 종점이 있길래 역의 거리를 검색해 보니 2.1킬로, 먼 거리는 아니지만 버스를 탔습니다.

나비고 패스를 내밀었더니 공짜라며 그냥 타라고 하더군요.

승객은 오직 나 혼자였습니다.

파리로 가는 기차가 바로 있었고 역시나 승객이 많지 않더군요.

그렇게 나비고 패스를 또 한 번 쏠쏠하게 사용했습니다.

한적하고 오래된 옛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다녀올만한 프로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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