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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Feb 18. 2024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

행복한 할머니, 타샤 튜더





소포를 받았습니다.

친구가 보낸 그 선물은 <타샤의 정원>이라는 책입니다.

축하할만한 기념일이 아닌 아무 날에 받은 선물이라 특별히 더 기분이 좋았지요.

이유 없이 주고받는 선물이야말로 참된 정이고 맘이니까요.


타샤 튜더(Tasha Tudor, 1915년 8월 28일-2008년 6월 18일 미국)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70여 년 동안 100권이 넘는 책을 낸 동화 일러스트입니다.

그녀가 그린 카드나 엽서는 백악관에서까지 사용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었습니다.

동화보다 더 동화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지요.


미국 버몬트 주 시골에 30만 평이나 되는 정원을 가꾸며 혼자 살았던 타샤는 손수 천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자잘한 꽃무늬가 있는 그녀의 옷은 대부분 치렁치렁하게 긴 코튼 드레스죠.

레이스가 달린 에이프런과 머릿수건을 쓰고 있는 모습이 화려하게 치장한 배우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은 20세기 초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염소젖으로 요구르트를 만들고 오래된 앤티크 가구를 사용하며 스토브에서 음식을 만듭니다.

인생은 우울하게 지내기엔 너무 짧다며 마리오네트를 만들어 인형극을 하고 직접 가꾼 허브로 에프터눈 티 타임을 즐깁니다.


책 속에 실린 그녀의 정원에 핀 꽃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름 하나하나가 생소한 꽃들은 지천으로 피어있지만 전문 조경사의 치밀한 계산보다 더 조화롭고 아름답습니다.

너른 풀밭엔 층층이 부채꽃과 패럿 튤립, 침실 창문 밖에는 참제비 고깔이, 돌능금나무 발목에는 수선화가 피어 있습니다.

현관에는 졸리 조커 팬지 바구니가 놓여있고 뒷문 옆에는 스노드롭과 파랑, 분홍, 살구빛이 뒤섞인 스위트피가, 동백나무 밑에는 스트렙토 카르푸스가 바다를 이루며 피고, 봄을 알리는 아네모네와 함께 샤프란, 꽃무릇, 글로리 오브 더 스노우가 있습니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돌계단에도 어김없이 꽃이 있지요.

페이퍼 화이트, 테트아테트, 민노우가 그것입니다.

'숙녀의 기쁨'이라고 표현하는 제비꽃과 보랏빛 향기를 내뿜는 라일락 프레지던트 링컨이라는 이름 또한 재미있습니다.

흰구름 같은 꽃송이로 응접실 해를 가리는 미스 엘렌 윌못이 있는가 하면 흔들의자 앞엔 디기탈레스가 위용을 뽐냅니다.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폭탄 모양의 페스티바 멕시마 작약과 보랏빛 버베나가 있고 7월에는 하얀 데이지로 화관을 만들어 오랜만에 찾아온 손녀의 머리에 올려주기도 하지요.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연상시키는 수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구름의 플러그를 뽑아버린 것 같은 가뭄이 지속되면 수련을 떠다가 욕조로 이사를 시키기도 합니다.

타샤가 유난히 좋아하는 임페리얼 실버 백합. 블랙 드래곤 백합과 분홍색 파리지엔느, 노란 발라드 같은 동양 백합, 그리고 단추 같은 피버퓨를 섞어서 화병에 꽂기를 좋아합니다.


가을 정원을 색스럽게 하는 샤프란과 돌담을 아 휘몰아치는 겨울바람까지 1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 '비밀의 화원'은 지상낙원이라는 말이 과장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 타샤 할머니가 지난 2008년 6월, 94세로 세상을 떠나셨지요.

여전히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수천, 수만의 꽃송이들을 남겨두고 말입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이라는 한 가지 의무뿐.'

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생각하며 내게 머물고 있는 바람의 꿈을 다시 써봅니다.






유럽, 어느 한적한 시골에서 산책과 침묵을 데리고 살고 싶습니다.

음악에 무한한 빚을 지고 돌아오면 쓰다만 글이 나를 반기는 곳, 그곳에서 여행의 뒷길처럼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말입니다.

가끔씩 남아도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설핏 잠이 드는 쓸쓸함까지 기꺼이 껴안고 싶습니다.

이끼 낀 돌벤치나 거대한 나무 둥치에 기대 앉아 책을 읽다가 하늘을 바라보는 게으름을 즐기기도 할 것입니다.


큰 창으로 가을빛이 자욱하게 고여 들고 밤이면 별빛들이 자잘한 꽃잎처럼 피어나는 모습을 혼자 차지하는 사치를 누릴 것입니다.

고요가 지치는 날에는 시장에 나가 생선파는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파란 사과 한 알 깨물어 먹으며 갓 구운 빵과 싸구려도 고급도 아닌 와인 한 병, 델 피니움 화분을 사갖고 올 것입니다.


착각 같은 봄이 오면 멍한 시선을 비끄러매고 발뒤꿈치에서 설레는 바람을 데리고 나가 꿈에게 마음을 맡기기도 할 것입니다.

비가 내린 후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 옅은 구름이 쓸려가는 푸른 하늘 냄새라든가 가랑비 자욱한 언덕에서 흐릿한 노을 냄새를 맡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휴식이 내리는 시간에는 라피스 라줄리를 닮은 저녁 빛을 불러 앉히고 모든 흘러간 과거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쓸 것입니다.

그 편지는 부재 속으로 찾아드는 침묵의 소리라서 길어져도 그리 수다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때 쓰는 글은 음악이 되고 한 밤의 침묵과 마음을 진동시키는 책을 읽는 시간은 내가 숨 쉬는 공기가 될 것입니다.

생각에 빠져 찻잔의 얼 그레이가 모두 식어버리는 흐름을 닮은 어젠 여름이었고 오늘은 가을인 나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2008년 9월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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