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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Apr 09. 2024

음악, 색실을 물고 가는 바람의 시간






개나리 꽃잎이 네 장인 걸 최근에 알았습니다.

목련 꽃은 세 장의 꽃잎이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자세히 봐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라고 한 시인의 말이 생각났지요.


아름다운 손님, 봄꽃들의 축제는 꽃능같은 영산홍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곤 하지요.

우면산 자락엔 여름을 마중 나온 초록이 싱싱하게 키를 키우고 있습니다.

시폰과 벨벳으로 매치된 블랙 원피스에 아이보리 재킷을 걸치고 라피스 라줄리의 푸른색 이어링을 걸었습니다.

음악회에 갈 때면 여느 날과 사뭇 다르게 성장을 하는 건 최고의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기쁨의 표현이지요.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아름다운 청년 김선욱을 만나던 날,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G메이저 협화음으로 시작되는 첫 다섯 마디의 피아노 솔로를 듣는 순간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이탈한 자동차처럼 내 심장 박동은 어긋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열여덞에 거머쥔 리즈 콩쿠르 우승은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란 걸 여실히 보여주더군요.

오케스트라는 감로수 같고 협연자는 조개의 상처로 만들어지는 진주를 연상케 했습니다.

라디오 프랑스 필의 호소력 있는 현 위로 이제 막 열아홉 살의 김선욱은 소리의 연금술사라 해도 좋을 듯 세 개의 악장이 사군자처럼 차별화된 그림을 연출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베토벤이 초연한 마지막 곡입니다.

'from the beginning'를 외치며 들리지 않는 귀로 인해 오케스트라와 맞지 않는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던 영화 <불멸의 여인>의 게리 올드먼이 떠오릅니다.


오케스트라의 실연을 듣는 건 수라상을 받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제 30세 장년에 된 라디오 프랑스 필 단원들은 대기실 문을 통해 일제히 입장하지 않았습니다.

객석이 하나 둘 채워지듯 연습실에 모여드는 모양으로 무대로 나와 자연스레 연습을 하더군요.

나는 정명훈의 표정을 보기 위해 합창석을 선택했습니다.

희열에 찬 미소로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단원들을 격려하는 애정 어린 몸짓, 거침없는 손맛과 얼굴의 떨림, 눈빛 하나까지 전율로 다가왔지요.


그동안 소위 유명하다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국내와 해외에서 많이 접했습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시카고 심포니, 쿠르트 마주어의 런던 심포니와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 유리 테미르 카노프가 지휘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키로프 오케스트라, 로린 마젤과 뉴욕필 등, 누가 1등이고 2등이랄 것 없이 언제나 그날의 연주는 최고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습니다.

그동안 음악회에서 열 번은 들어보았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날 것의 음표들만 나를 떨게 했지요.

베를리오즈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점과 정명훈의 프랑스 사랑이 의미 있듯 그날의 <환상 교향곡>은 기묘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보았던 스코어가 차창을 스치는 풍경처럼 지나가고 악장의 숫자가 뒤로 갈수록 끝남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왔죠.

목관 3 연음으로 시작되는 1악장은 변화무쌍 그 자체로, 하프로 시작되는 2악장에선 춤을 추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기도 했어요.

잉글리시 호른과 숨은 그림자 소리를 내는 오보에와의 대화로 시작되는 3악장에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4악장 마지막 투티는 사정없이 두드리는 팀파니가 마음의 멍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드디어 5악장,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보이지 않던 악기 벨의 C와 G 소리가 무대 안쪽에서 들려왔습니다.

또한 바이올린 활등으로 현을 두드리는 콜레뇨 주법조차 '해곡들의 춤' 이기엔 너무 가슴이 벅찼지요.

이윽고 심벌즈의 화려한 날갯짓을 끝으로 환상의 질주는 멈췄습니다. 

하지만 심장의 불규칙한 떨림은 좀처럼 제 템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기립으로 화답하는 청중에게 정명훈은 말했습니다.


'음악가에게 음악을 안 단어로 표현하라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포레의 이 곡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중 시칠리아 무곡>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제 맘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앙코르 곡은 흥분된 청중들에게 강력한 진정제였습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음악이 끝나자 아무도 일어서지 못했지요.

오히려 두 번째 앙코르 <카르멘> 서곡은 청중들에게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너무 좋은 날은 내 안의 나를 보기가 쉽지 않다고요.

그날 음악이 그랬습니다.

그 음악을 끈으로 매달아 데려가고 싶었지요.

하지만 시간은 음악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습니다.

로비에서 구입한 정명훈과 피리 바스티유 오케스트라의 <환상교향곡> 음반만 남았지요.

들뜬 마음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을 맞으며 생각했습니다.

음악은 여럿의 색실을 물고 가는 바람의 시간이며 오늘 만난 소리의 실타래는 바로 정명훈의 사랑이라는 것을요.  (2007년 6월)





가브레일 포레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중 시칠리아 무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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