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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Apr 27. 2024

말없는 얼굴, 손

유섭 카쉬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 바흐의 프렐류드가 들려왔다.

흑백사진과의 어울림이 절묘하다.

음악이 사진의 그림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주를 하고 있는 한 첼리스트가 있었다.

첼로에 집중하는 뒷모습의 주인공은 파블로 카잘스.


그날 내가 방문한 전시의 주인공 유섭 카쉬(1908-2002)는 아르메니아계 캐나다인 사진가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 사진 작가 한 명이다.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생존자였던 카쉬는 난민 신분으로 캐나다로 이주했고 미국에서 살았다.




유섭 카쉬



그는 카잘스를 만나기 위해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운전하는 동안 순례자가 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프라드의 성 미셀 쿡사 수도원,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 유쾌한 시간을 보낸 후 촬영을 위해 조용하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카잘스가 연주를 시작하자 카쉬는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자신이 그곳을 방문한 목적을 잊은 채 한동안 음악에 빠져들어갔다고 한다.

순간 높이 위치한 작은 창문과 빈 방의 구조가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고 늙은 예술가의 음악이 창문을 타고 감옥을 벗어나 전 세계로 울려 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카쉬는 한 번도 등지고 있는 사람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지만 이번만은 왠지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주효했고 그렇게 탄생한 사진이었다.

사진에서 성스런 아우라가 퍼져 나왔다.



 

파블로 카잘스




보스턴 미술관에서 카쉬전을 할 때였다.

한 노신사가 매일 같은 시각에 전시장을 찾아와 카잘스의 사진 앞에 오래도록 서있다가 가곤 했단다.

어느 날, 호기심이 가득한 큐레이터가 노신사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항상 이 사진 앞에만 서계십니까?"


그러자 노신사는 그를 나무라듯 말했다.


"조용히 하게, 내가 지금 음악을 듣고 있는 게 안보이는가?"


그렇다.

그는 카잘스의 사진에서 바흐의 프렐류드를 듣고 있는 것이었다.

음악은 어떤 풍경이나 배경도 부드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죽은 자들의 사진 사이를 떠도는 음표들은 막힌 공간의 폐쇄성을 상쇄시키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카쉬가 버나드 쇼에게 사진 요청을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아무리 사진을 잘 찍는다 해도 그 사진은 어제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집에서 주인의 어깨너머로 보이던 내 모습보다 못할 걸세."


그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당시 상황을 함께 기록한 사진가로도 유명한데 기지와 위트, 철학이 묻어나는 에피소드 역시 사진만큼 훌륭한 텍스트로 남아있다.

머리카락과 수염, 주름진 피부, 손의 모습과 생생한 눈빛은 왜 그들이 명사인지, 왜 유럽 카쉬인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버나드 쇼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카메라 옵스큐라가 등장한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의 그림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그의 그림에 빛이 잘 묘사된 이유가 바로 카메라 옵스큐라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진기의 기원이자 카메라의 어원이 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이다.

어두운 방의 지붕이나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반대 편에 하얀 벽이나 흰 천에 옥외의 실상을 거꾸로 찍어내는 장치이다.

가을 같은 음색이 애잔하게 흐르는 영화인데 그림과 음악을 좋아한다면 한번쯤 볼만하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찍히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에 속하는 나는 사진에 관심이 많다.

배병우의 소나무나 김영갑의 제주 사진을 좋아한다.

카쉬의 사진은 살아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들과 눈을 맞추는 시간은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얼굴 성형은 물론이요, 전신 성형이 난무하고 사진 역시 포토 샵으로 깎고 늘이고 부풀리며 맘대로 뜯어고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카쉬가 찍어낸 흑백의 인물들은 힘이 있었다.

인간의 주름진 피부와 머리카락이나 올올의 수염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이 그토록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다.

그 얼굴들에서 작가의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전시장을 나오다가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흘끗 보았다.

얼굴에 새겨진 세월은 짧고 표정의 깊이는 얕았다.

손은 말없는 얼굴이며,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이라고 한다.

사진은 순간의 기록, 아니 시간의 포착이랄까?

시각(視角)과 시각(詩角)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사진은 시간의 층을 얇게 나누는 것이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전시실을 나왔다. (2009년 4월)




테레사 수녀님
Bach: Prelude 1 in C Major BWV 846 from the Well-Tempered Clavier



위의 카잘스의 모습 사진을 촬영한 프랑스 프라드의 성 미셀 쿡사 수도원에서의 연주 영상(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Pau Casals: Bach Cello Solo Nr.1, BWV 100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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