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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14. 2024

사진은 내 마음을 담는 네모난 그릇

19.  발 도르차








일상으로 돌아갈 때 보다 여행할 때 마음이 더 편합니다.

아니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면 겁이 납니다.

이쯤 되면 병입니다.


키안차노 테르메에 온 지도 5일이 지나고 토스카나를 떠날 날이 단 이틀 밖에 남지 않았지요.

애인과 헤어지는 마음이 이럴까요?

벌써 아쉽습니다.

이른 아침, 차를 타고 달립니다.

목적지는 없습니다.


'Here & now'


혼자에게 가는 중입니다.

먼 길을 떠나는 일은 고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걸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단지,


'좋아서'


그렇게 단순합니다.











장 그르니에의 책 '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 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낯 선 곳에서 혼자 살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몇 개의 비밀, 그런 것 필요없이 단순한 자유를 꿈꾸어봅니다.


가다 서며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나 프레임에 담는 것으로 만족이 되지 않았지요.


그냥 여기부터 저기까지 푹 떠서 가져가고 싶습니다.

아니 요만큼만 싹둑 잘라 착착 접어 가방 속에 넣어가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생각은 잘못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풍경은 이곳에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그래야 또 찾아올 수 있을 테니까요.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햇살과 비와 눈을 껴안고 바람에 흔들릴 뿐 화내지 않습니다.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

햇살에 비치는 구름,

어느 하나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순하게 지키지요.

그러므로 자연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나도 순해집니다.

  


사진은 내 마음을 담는 네모난 그릇입니다.


기쁨 만족 즐거움 흐뭇함 쓸쓸함 감탄 아쉬움...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내가 들어있습니다.


사진은 기억 속에 들어있는 시간과 이미지를 잊히지 않게 돕는 힘이 있지요.

피사체를 바라보는 나를 기록해 주는 게 사진입니다.

피사체 너머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그 시간, 그 장소의 나 자신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그래서 찍습니다.


내 여행의 8할은 사진입니다.



해가 아직 구름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풀과 언덕이 부드럽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아직 키를 세우지 못한 해는 서쪽으로 사이프러스의 키다리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지요.

















그날 오후, 구름이 많습니다.

마음이 자꾸 떠다밉니다.


'어서 나가지 않고 뭘 망설이는 거야?'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피엔차로 향했지요.

주차장을 나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발도르차 평원이 펼쳐져 있는 길이 보였습니다.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여기 이런 길이 있었구나.'


길을 따라 걷습니다.

짐작대로 피엔차 성문과 연결이 되더군요.

 

성당 앞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있습니다.

추모의 의미일까요?

건물마다 달려있는 철재 링(말이나 마차를 매어놓던 링)에는 노란 애니시다가 빈틈없이 꽂혀 있습니다.

햇살이 핀 조명처럼 비추고 있어 황금빛입니다.


그 저녁의 빛 속을 사람들이 오고 갑니다.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풍요로운 시간이죠.

고독한데 행복합니다.

고독은 혼자를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니까요.















내친김에 비탈레타 예배당으로 향했습니다.

구름 사이로 빛이 쏟아집니다.


열흘 전에 있던 건초더미는 어느새 사라지고 언덕은 또 다른 표정입니다.

노란 유채꽃이 초록과 어울려져 연둣빛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밀밭은 어느새 누레지고 길가의 귀리도 더 이상 초록이 아닙니다.


역시나 그날도 카페는 문을 닫았습니다.

너무 늦게 온 거죠.

의자에 앉았습니다.

건너편 산기슭에 사이프러스가 보입니다.

그냥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인간은 미소와 통곡 속에 매달린 추라고 했습니다.(영국 시인 바이런)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고 했습니다.(찰리 채플린)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여행지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얼굴입니다.

타인이 보는 내 모습도 다르지 않겠지요.

그러나 삶은 마냥 밝지 않습니다.

그림자도 있고 상처도 있지요.

'나는 왜?, 나만 왜?' 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삶에서 중요한 건 많습니다.

건강해야 하고 금전적인 안정도 필요하지요.

많음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 즐거운가? 그걸 알아야 합니다.


감사와 반성 또한 중요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욕심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내 주장을 앞세워 상대방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았는지 뒤돌아보는 시간도 중요합니다.


이른 아침, 그리고 해 질 녘 풍경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갔다 오길 잘했다 스스로에게 칭찬합니다.

인생은 왕복이 아닙니다.

길면서도 짧은 '편도 여행'이지요.

매 순간 소중합니다.

남은 인생, 자연처럼 욕심 없이 가야겠습니다.








'욕심은 만족에 이르지 못한 채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끝없는 노력으로 사람을 지치게 하는 바닥 없는 구덩이다.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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