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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21. 2024

언니, 드디어 내 아가미가 열렸어

23. 폴리냐노 아 마레(Polignano a mare)






바리에서 폴리냐노 아 마레(polignano a mare)까지는 기차로 30분, 3유로이다.

풀리아 지방은 아드리아해를 접하고 있는 아름다운 해변마을이 무척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험준한 바위 위에 흰색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폴리냐노 아 마레 아래쪽의 카라 포르토(Cala Porto), 또는 라마 모나칠레(Lama Monachile)라고 불리는 비치이다.

여행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두 번쯤 보았을 사진이 바로 그곳이다.

워낙 유명하고 작은 해변이라 오후에 가면 앉을자리가 없다고 하여 아침 10시에 기차를 탔다.


10분쯤 걸었을까?

보르보니코 다리(Ponte Borbonico)의 기다란 아치 사이로 해변이 보였다.

일단 근처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크루아상, 티라미수를 사 갖고 라마 모나칠레로 내려갔다.

발 빠른 여행자들이 드문드문 커다란 타월을 깔아놓고 자리를 잡고 있다.

혼잡해질 것과 뜨거운 햇빛을 염두에 둔 우리는 오른쪽에 있는 편편한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작은 협곡처럼 양쪽으로 높은 절벽 바위가 둘러져있어 골바람이 불어오니 가만히 앉아있으면 한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탈의실이나 샤워 시설이 없다.

간혹 자연스럽게 탈의하고 수영복을 입는 사람도 있지만 그 누구도 시선을 두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게 그들의 문화이다.











워낙 바다 수영을 오래, 그리고 많이 해본 SH는 탈의용 옷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얇고 넓은 천의 한쪽을 박아서 커다란 원통형으로 만든 후 목 부분에 고무줄을 넣은 스타일이다.

그러니까 목부터 발목까지 오는 길고 넓은 판초 모양이다.


장난기 그득한 MH는 그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173cm의 큰 키의 긴 팔로 허적 대는 모습이 흡사 홍보용 바람 풍선 인형 같기도 하고, 노르웨이의 폭포수 앞에서 춤을 추는 전설의 여신 훌드라가 생각나기도 하고, 행위 예술을 하는 무용수 같기도 하여 한참을 웃었다.

 

어쩐 일인지 자갈 해변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두 선탠만 할 뿐 바다에 들어가서 수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람 때문에 파고가 높은 편이고 수온이 아직 차가울 거라고 예상했다.

수모와 수경, 오리발과 스노클까지 챙긴 SH가 당당하게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발 도르차에 있을 때 그녀가 말했었다.


'언니 내 아가미가 점점 닫히고 있어. 바다가 그리워.'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일까?

여행을 시작한 지 25일 만이다.

그녀는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동굴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바다에서 30km, 그러니까 10시간을 수영했던 때가 있다고 했다.

참고로 나는 수영을 못한다.

물 공포증이 있어 배도 못 탄다.

그러니 그 말은 어떻게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영화를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미국 배우 아네트 베닝(Annette Bening, 1958~)이 주연이다.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을 갖춘 그녀도 세월은 비켜가지 못하는 듯 주름이 많다.

하지만 연예인들이 으레 껏 받는 의술로 주름을 지우지 않은 그 모습이 훨씬 아름다워 보이고 믿음이 간다.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는 세계적인 수영선수 다이애나 나이애드(현재 75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아네트 베닝이 나이애드를, 조디 포스터가 나이애드의 친구이자 코치인 보니를 연기했다.


그녀는 쿠바 하바나에서 플로리다 키웨스트까지 수영으로 횡단을 도전하는데 그 거리라 무려 177km, 가장 좋은 경로를 골라서 가도 최소 이틀 이상 가야 한다.

독성해파리, 상어와 싸우고 환청에 시달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이윽고 나이애드는 4번의 실패 후에 다섯 번째 도전에서 드디어 횡단에 성공한다.

그녀 나이 64세였다.

지금의 내 나이다.


그 영화를 본 후 SH가 말한 30km 수영이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SH에게 혹시 그 영화를 보았느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당연히 봤죠, 언니 ^^,라는 답이 왔다. 

SH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용기가 멋지고 존경스럽다.







자매 둘이 바다로 들어간 후 SY와 함께 절벽 위의 마을로 올라갔다.

아르코 마르케살레(Arco Marchesale)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니 그곳 역시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집들이 모여있다.


라탄 바구니에 샌들을 하나씩 넣어 디스플레이해 놓은 센스,

올망졸망 엄마한테 매달려 있는 아기 선인장, 

작은 나무 막대기는 배가 되고 세모의 돌조각에 색칠을 하여 돛을 만든 기념품이 앙증맞고

파란색을 배경으로 집게로 걸어둔 그림엽서들이 모여 또 다른 한 장의 엽서가 되고 있었다.

















풀리아의 반대편에 있는 섬 시칠리아에서도 많이 보던 금색에 가까운 누런 항아리들이 풀리아 지역 어디에서나 보였다.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있는 기다란 모양의 항아리가 대체 무엇일까 궁금하여 호스트에게 사진을 보내 물어보았다.  

그것의 이름은 부밀레(Vummile), 점토에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테라코타로 옛날에는 올리브 오일이나 와인을 넣어놓는 용도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인테리어용으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크기와 색상이 각각 다른 부밀레들이 무척 많다.

특히 벼룩시장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유럽에서 가장 탐나는 첫 번째가 그림이다.

빈티지 가구와 부밀레 같은 인테리어용 소품들도 좋아한다.

주방용 식기와 접시, 에스프레소 잔도 갖고 싶다.

하지만 물건에 대한 욕심도 조금씩 사라진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곳 역시 주변 풍경을 그린 그림을 파는 곳이 있다.

강렬한 컬러를 사용했지만 심플한 구도로 인해 군더더기가 없는 게 맘에 든다.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남자는 아마도 그곳의 주인이며 화가가 아닐까 싶다.

주변의 벽을 이용해 정성스럽게 디스플레이한 게 꽤 센스 있어 보인다.

'저 그림 한 점 살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예전 같으면 샀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뭔가를 소유한다는 게 짐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퇴직하기 전 마음먹은 게 있었다.

이제 점점 기운도 없어지고 몸이 아플 수도 있을 테니 그전에 주변 정리를 하나씩 하자는 거다.


퇴직하던 해, 당근 마켓을 통해 출근할 때 입던 옷가지와 가방, 신발, 스카프, 액세서리 등을 팔았다.

'내가 장사에 소질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약 40일 동안 350여 점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내 재산 목록 1순위였던 소중한 음반과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월급을 타면 항상 찜해두었던 CD와 책을 샀다.

일종의 보상 심리 같은 것이었을 거다.

그렇게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같은 음악이라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다른 음반도 꽤 많았다.

목공소에서 주문 제작한 CD장에 작곡가별로 구분하여 정리할 정도로 아끼던 음악이다.

거의 40년 이상 모은 클래식 음악 CD와 DVD, LP가 수 천장,

망설임 없이 모두 판매했다.


기세를 몰아 책도 약 2천 권 정리했다.

전공 서적인 음악 관련 책과 지금은 절판된 태림출판사의 스코어 전집(약 140권의 악보)도 모두 처분했다.

그러나 미술, 여행, 인문학, 시집 등 1000여 권은 남겼다. 

그러면서 깨달은 게 있다.

소유하고 있다고 다 내 것이 아니다.

입지 않는 옷, 듣지 않는 CD, 읽지 않는 책들은 이미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걷다 보니 라마모칠레 해변이 보이는 절벽 끝에 다다랐다.

기타를 치며 버스킹을 하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절벽 아래 해변을 내려다보니 아까보다 훨씬 사람들이 많아졌다.

카메라의 줌을 최대로 당겨서 살펴보니 SH가 수영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름을 소리쳐 부르기엔 민망하거니와 그게 들릴지 말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여기 바라보면 좋을 텐데 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때 텔레파시가 통한 듯 SH가 절벽 위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있는 힘껏 팔을 흔들었더니 그녀도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물 만난 고기가 아니라 물 만나 아가미가 활짝 열린 SH의 기분 좋은 에너지가 전해졌다.


 











폴리냐노의 절벽에는 파도의 힘에 의해 생긴 크고 작은 동굴이 약 스무 개쯤 있다. 

대부분 보트 투어로 주변을 돌아본다.

그중 가장 큰 동굴은 궁전 아래에 있어서 붙여진 팔라체세(Palazzese), 즉 궁전 동굴이라고 불린다.

그곳은 현재 5성급 호텔로 이용되고 있는데 그 호텔보다 더 유명한 것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만든 레스토랑 그로타 팔라체세(Grotta Palazzese)이다.


디너 코스 요리는 1인당 350유로(약 53만 원), 거기에 와인이 빠질 수는 없을 테니 두 사람이 식사하면 적어도 140~150만 원은 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약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기막힌 뷰와 최고의 서비스는 음식 맛을 능가하겠지만 보통의 여행자들은 엄두를 내지 못할 곳이다.

특별한 날, 예를 들어 청혼을 한다거나 기념할만한 날의 이벤트가 아니라면 굳이? 하는 생각이다.

비즈니스석을 타는 것보다 이코노미석이더라도 여행 한 번 더 가는 게 더 좋은 나로서는 그곳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폴리냐노에는 노래 중간쯤, '볼~~ 라레'라는 가사가 나오는 칸초네, 볼라레를 부른 가수 도메니코 모두뇨(Domenico Modugno)의 동상이 있다.

알고 보니 폴리냐노는 그의 고향이란다.

잊고 있던 옛 노래를 다시 찾아 들어보니 도메니코는 아직 살아있는 듯하다.

그리워할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녹음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해변으로 돌아오니 두 자매가 바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짐작대로 수온이 차고 파도가 높다고 한다.

게다가 해변도 자갈인데 바다 속도 온통 자갈이라 발이 아프단다.

SH는 4개의 동굴에 들어갔다 왔는데 너무 캄캄해서 깊숙이는 못 들어갔단다.

배도 못 타는 나는 상상만 해도 무서워 말했다.

'어휴, 박쥐라도 나오면 어떡해?'


자매들은 계속 폴리냐노에 머무르기로 하고 나와 B는 기차로 10분 거리의 모노폴리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해변으로 향하는 돌담에는 알록달록한 비치웨어들이 걸려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이가 없다.

하루에 몇 개나 팔릴까?

유럽의 관광지에는 어딜 가나 거리에서 뭔가를 파는 흑인 상인들이 있다.

그들은 늘 뭔가를 팔고 있었으나 사는 이의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때마다 괜히 맘이 짠하다.

마치 날지 못하고 벽에 걸린 풍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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