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나무 Jul 20. 2024

둥근 마을, 동그란 발코니

22. 로코로톤도(locorotondo)






알베로벨로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로코로톤도는 라틴어로 '둥근 장소'라는 뜻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보이는 주변의 모습은 그냥 평범하고 작은 도시의 한 구석.


이렇듯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도착하여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될 때는 역사지구, 그러니까 구 시가지를 뜻하는 센트로 스토리코(centro storico, 이탈리아어)를 검색하면 쉽다.


장미창이 아름다운 성당 마돈나 델라 그레카 성당이 보여 들어가 보았다.

로코로톤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하얀 제단과 마리아 상이 소박하다.








대리석이 닳아서 반들반들한 계단과 아름다운 집이 보였다.

그 계단으로 올라가면 올드시티의 중심으로 연결되는데 그때는 모르고 잠시 앉아 쉬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새로운 성문이라는 뜻의 포르타 누오바가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니 매력적인 하얀 집과 자갈길이 이름의 뜻처럼 구불구불 둥글게 이어졌다.


로코로톤도 역시 중세 도시라 집들은 대부분 2층 또는 3층이다.

아치형의 커다란 문, 강렬한 햇살을 가려주는 나무 덧창, 화려하게 멋을 부린 발코니, 키를 맞춰 세워둔 선인장 화분, 갓 세탁한 빨래 등 평범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누군가에게는 별 볼 것도 없이 대수롭지 않은 그런 분위기다.     

하지만 유럽이 대부분 그렇듯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건 마치 마법의 성으로 들어가는 듯 느릿느릿 걷게 된다.

 












구시가지의 중심에는 우아한 아이보리 컬러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광장(Piazza Vittorio Emanuele II)이 있다. 

그곳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한때 모렐리 가문의 거주지였던 모렐리 궁전(Palazzo Morelli),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기둥과 복잡한 조각으로 장식된 웅장한 입구 위에는 건물의 풍부한 역사와 유산을 보여주는 가문의 문장이 있다.


발코니의 철재 프레임은 패티코트를 입어 크게 부풀린 여인의 드레스처럼 둥글게 구부러져 있다.

화려하지만 짙은 컬러로 인해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수백 년 전, 귀부인이 드레스를 입고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발코니의 프레임을 둥글게 만든 것은 실제로 드레스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테라스, 발코니, 베란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는 것 같지만 뭔가 아리송하다. 

명쾌하게 알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테라스(Terrace)는 평평한 땅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높은 면(층)에 배치되는 야외 공간을 말한다.(이탈리아어로 떼라, terra 역시 땅이라는 뜻)

쉬운 예로 건물의 꼭대기층에 있는 루프탑 테라스를 생각하면 쉽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라운드 층의 오픈 가든 형태의 테라스가 더 많다.

유럽의 레스토랑이나 카페는 대부분 영업시간이 되면 광장이나 길거리에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영업을 하는데 그게 테라스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발코니(Balcony), 이 말 역시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큰 창문이라는 뜻이다.

발코니의 가장 큰 특징은 별도의 구조로 튀어나온 바닥면을 지닌 공간, 즉 아렛 부분이 비어있어 떠 있는 공간이다.

발코니 역시 유럽의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오페라 극장의 발코니석은 무대 옆의 특별 관람석을 칭하기도 한다.

건물벽에서 확장된 공간으로 하나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으며 테라스보다는 훨씬 작다.






베로나 줄리엣의 집, 발코니



베란다(Beranda)는 아래층의 면적이 넓고 위층의 면적이 좁을 경우 아래층의 지붕 부분이 남게 되는데 이 부분을 활용한 공간이 베란다이다.

발코니가 공중에 떠 있는 공간이라면 베란다는 아래층의 위에 있는 빈 공간이다.





또 한 가지, 포치(Porch)라는 게 있다.

영국에서는 교회 현관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현관 또출입구에 설치되는 공간으로 방문객이 집주인을 기다리는 공간으로 현관  바깥쪽에 돌출되어 있으며 지붕이 있다. 

영국의 농가 코티지에는 대부분 포치가 있다.






지역의 화랑에는 대부분 그곳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 많다.

그러므로 화랑에서 밖에 내 건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도시의 특징이 무엇인지 이해가 쉽다.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는 중심 언덕의 하얀 집, 그곳이 로코로톤도이다.  


낡아서 못쓰게 된 창틀을 떼어 만든 액자에는 녹슨 경첩이 그래도 붙어있다.

그 투박하고 뭉툭한 멋이 내 시선을 가로챈다.

털이 뭉개진 여러 개의 가느다란 붓들이 양철통에 무심히 꽂혀있다.

넘어지지 않게 돌로 받쳐놓은 그림 한 장,

하얀 벽이 그대로 캔버스가 되고 곁들여 놓은 화분은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오브제가 되고,

나는 이렇듯 사소하고 소박한 풍경의 조각들을 바라보는 순간들이 행복하다.












갑자기 규모가 꽤 큰 브라스 밴드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흰 셔츠에 검은 타이를 멘 연주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 행진하며 연주를 하는데 어림잡아 30여 명은 된다.

대부분 마칭 밴드는 관악기와 타악기로 구성되는데 행진곡이기 때문에 주로 4박자의 경쾌한 리듬과 멜로디가 특징이다.

하지만 그 음악은 마치 장송 행진곡처럼 느리며 어둡고 엄숙하며 무거웠다.


'혹시?' 


하는 의문을 갖고 연주자들의 행진을 피해 한쪽에 서서 사진을 찍는데 뷰 파인더로 들어온 어떤 모습에 화들짝 놀라 급히 카메라를 내렸다.

상상한 대로 그것은 장송행진곡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인도 바라나시 골목에서 갠지스강가의 화장터로 가는 시신을 본 이래로 외부 공간에서 관을 맞닥트린 것은 처음이어서 충격이 제법 컸다.

 


  





찰리 채플린이 그려진 에스프레소 카페 콘트로 텐덴자는 그냥 시골 마을의 정자를 연상시킨다.

커다란 나무 아래 테이블이 드문드문 놓여있고 간단한 음식과 빵, 커피와 음료를 판매한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인이 말을 건넸다.


'당신 참 예쁘네요. 특히 웃는 모습이 참 귀여워요.'


낭낭 18세처럼 언제나 웃음이 많고 해맑은 MH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MH는 


'나? 나한테 하는 말이야?'


하며 더 크게 웃으며 그라찌에 밀레를 연발했다.


그녀는 로코로톤도에 살고 있는데 6년 전 삼성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서울에 자주 갔었다며 친밀감을 나타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맞았음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숏 컷의 헤어가 세련되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멋스러운 그녀의 옷차림과 인상에서 풍기는 멋이 무척 지적이고 전문적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덕담을 나누고 차오~,  인사를 전한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리행 버스를 타러 갈 시간이다.







오후 5시의 햇살은 한 여름 오후 2시처럼 뜨거웠다.

버스를 기다리는 도로 옆 인도에는 대여섯 명의 여행자들이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예정 시간보다 한참을 지나서야 도착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고  B는 2열에 앉았다.


버스 기사는 운전을 하면서 어디론가 오래도록 통화를 했다.

한 30분쯤 갔을까?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 앞에는 또 다른 버스가 정차해 있었는데 그 버스의 승객들이 내가 타고 있는 버스로 우르르 몰려왔다.

 

안내 멘트는 없었지만 아마도 앞의 버스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좌석이 모자라 서서 가야 하는 승객도 생겼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인지 버스 기사는 알베로벨로로 갈 때와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고속도로로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기사는 운전을 그만두고 곧바로 음악과 한 몸이 되었다.

그의 오른발은 브레이크도 엑셀레이터도 아닌 버스 바닥을 탁탁 치며 리듬을 맞추고 두 손은 핸들 위에서 춤을 춘다.

버스 기사는 버스를 크루즈 컨트롤(자율 주행 모드)로 맞추어 놓은 것이다.


고속도로는 이미 퇴근 시간과 맞물려 느릿하다.

수십 명의 승객을 태운 기사의 손과 발은 버스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과는 무관하게  음악의 장단에 맞추어 몸을 맡기고 있는 게 영 마땅치 않았다.

물론 자동차의 기능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생각의 차이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점점 하강하고 있는 햇빛은 버스의 앞유리창을 통과해서 그대로 내 얼굴로 꽂히고 에어컨도 시원치 않아 땀이 줄줄 흘렀다.


그나저나 뒷자리에 앉은 BB는 괜찮으신가 궁금하다.


'옆에 앉지 말고 뒷자리에 혼자 타보세요. 누가 알아요? 근사한 이태리 할아버지 친구 하나 생길지 모르잖아요.'


하며 따로 앉았었는데 앞 버스에서 내린 중년 남자가 그 옆에 앉게 된 것이다.

1시간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거의 2시간이나 넘게 걸려서 드디어 바리에 도착했다.


'옆 자리에 앉은 분은 어땠어요?'

'근사했지, 무척 신사더라고. 키도 크고 몸집도 큰데 나한테 몸이 닿을까 봐 아주 조심조심 꼿꼿하게 앉아 있는 게 느껴졌어.

그런데도 버스가 움직이니까 가끔씩 그 아저씨 팔이 나한테 닿았잖아. 그때마다 몽실몽실한 터래기의 느낌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나쁘지 않았어.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내려서 보니까 와이프가 있더라고, 그래서 좀 아쉽네!'


평소에 유머가 뛰어난 BB의 '터래기' 라는 말에 폭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풀리아에서의 첫 여행, 알베로벨로와 로코로톤도에서의 하루가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갔다.


내일은 아가미가 점점 마르고 있다는 SH가 그렇게 기다리던 바다 수영을 하러 가는 날이다.

고래라는 별명이 붙여진 SH는 이탈리아 여행을 오기 2주 전까지 제주도에서 혼자 1년을 살았을 정도로 바다 수영을 좋아하는 친구이다.

그녀의 아가미가 활짝 열릴 아드리아해가 덩달아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붕을 빨리 허물어야 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