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레체 (Lecce)
즉 풀리아 지방의 주요 해안 도시가 하나의 노선에 있다는 말이다.
바리에서 레체까지는 약 1시간 40분으로 당일치기가 가능하다.
레체는 남부의 피렌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라며 호스트들이 적극 추천한 곳이기도 하다.
구시가지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마주친 곳은 산 토론초 광장(Piazza di Sant'Oronzo),
한가운데에 레체의 수호성인 오론초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우산을 파라솔처럼 높게 고정시킨 버스커가 악기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광장의 타원형에는 도시를 대표하는 문장인 암늑대와 느티나무의 모자이크가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광장을 가로질러 걷는 사람들은 그것을 밟지 않는 게 보였다.
그곳은 고대부터 암늑대를 토템 동물로서 우상시했고 힘의 상징인 느티나무는 자유와 교활함의 상징인 암늑대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미신에 따르면 레체의 문장인 암늑대 위를 걷는 것은 엄청난 불운과 실패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라고 전해지기 때문에 함부로 밟지 않는다고 한다.
레체 여행의 중심은 대성당인 두오모에서 시작된다.
대성당은 종탑과 두 개의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에 있는데 차분하면서 화려한 장식이 돋보인다.
광장으로 들어서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이 보였다.
사진을 찍는 나를 발견한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내가 움직이는 대로 자세를 바꾸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어떻게든 동전을 얻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랄까?
하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과 제스처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서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없었다.
2유로짜리 동전 하나를 던져주니 그제야 자리에 앉는다.
레체의 두오모는 성당 정면의 화려한 파사드가 인상적이다.
살렌티나 건축학교 출신인 주세페 짐바올로의 작품으로 1144년에 처음 건축되었다가 1659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두오모 티켓을 사려다가 레체의 성당 5개를 모두 볼 수 있는 통합 티켓을 구입하였다.(12유로)
웅장한 회랑이 있는 안티코 세미나리오(Antico Seminario) 궁전, 산 조르지오(San Gregorio) 예배당, 산 마테오 (San Matteo)와 산타 키아라(Santa Chiara) 교회, 그리고 바로크 양식의 보석인 산타 크로체(Santa Croce)를 둘러볼 수 있다.
대성당의 왼쪽에 있는 종탑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별도의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대성당으로 들어갔을 때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익숙한 곡은 바로 카치니의 곡으로 알려진 아베 마리아였다.
일단 의자에 앉았다.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를 우연히 접할 때가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아베 마리아' 하면 슈베르트와 구노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 소프라노보다 메쪼 소프라노의 음색을 좋아한다.
남성 역시 테너보다 바리톤을 선호하는 편이다.
라트비아 출신의 메쪼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의 CD를 구입하였는데 그곳에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가 수록되어 있었다.
'카치니?'
당시 그 이름은 생소한 작곡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베 마리아'라는 가사 하나만 반복되는 그 곡은 처음 들을 때부터 풍덩 빠져들 정도로 깊은 흡인력이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드라마, CF에 삽입되는가 하면 조수미 등 톱클래스의 가수들이 본인들의 새 음반에 그 곡을 수록하기 시작했고 유명세를 탔다.
몇 년 후, 이 곡이 카치니가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카치니가 활동했던 르네상스 시절에 '성모 마리아'의 기도문은 성경의 구절을 따온 가사여야 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베 마리아'만 반복되는 보칼리제(가사 없이 모음만으로만 부르는 곡으로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가 유명)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종교 음악은 다성으로 작곡되어야 하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곡은 일반 반주에 따른 독창곡으로 그 시대의 음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뿐만 아니라, 카치니의 음악적 특징과는 거리가 먼 화려한 반주, 풍부한 화성들이 동반되어 있어 음악학자들의 많은 의심을 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카치니는 종교음악을 단 한 곡도 작곡하지 많았다는 점이다.
결국 이 작품은 카치니가 아닌 '블라디미르 바빌로프(Vladimir vavilov)라는 러시아 작곡가가 1970년에 작곡한 것이라는 게 확인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바빌로프(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Вавилов, 1925년 5월 5일 ~ 1973년 11월 3일)는 러시아의 기타・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다.
그러면 그는 왜 카치니의 이름을 도용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바빌로프 본인이 카치니의 이름을 고의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으로 보인다.
출판 또는 음반사에서 나름 유명하면서도 명의 도용 시비가 걸릴 일 없는 카치니의 이름을 빌린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카치니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세간에서는 카치니의 곡으로 불려지고 알려져 있다.
대성당 옆쪽의 셀레스티네스 수도원(Antico seminario museo arte)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산 그레고리오 타우마투르고 예배당, 그림, 조각상, 귀중한 가구 및 전례용품이 보관되어 있는 사크라 미술관, 3단의 계단 위에 우아하게 솟아 있는 레체 돌로 만든 작은 우물이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레체의 꽃은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성당이다.
산타 크로체는 14세기에 처음 수도원으로 지어지기 시작하여 1695년에 완공되었는데 바로크 양식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부유했던 바로크 시대는 건축물의 화려한 디자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컬러풀한 대리석으로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멋을 낸 피렌체의 두오모와는 느낌이 다르다.
당시 유럽의 성당들이 주로 대리석을 이용했지만 산타 크로체 대성당은 현지에서 나는 라임스톤(사암)을 이용하여 지은 것이 특징이다.
크림색, 노란색, 커피색, 라테색 등 다양한 색상의 라임스톤들이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라임스톤은 보통 사암이라 불리는 돌이다.
엄밀하게는 퇴적암으로 생물체의 조각이나 알갱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게는 미세한 파편에서부터 크게는 공룡의 뼈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대부분의 라임스톤은 바다를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작은 해양 무척추동물의 화석과 조개껍데기로 이루어져 무른 편이다.
특히 성당 전면부의 파사드를 보면 그 정교함과 화려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바로크식 꽃다발이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확실히 이탈리안은 손을 쓰는 솜씨가 가히 세계 최고이다.
성당의 중앙 출입구의 양 옆에는 신과 여신의 모습으로 장식된 코린트식 기둥이 있다.
스페인의 왕 필립 3세, 레체의 백작 부인, 브리엔의 월터 6세 등의 문장이 새겨져 있고 난간에는 동물상과 여인상, 천사상이 장식하고 있다.
장미창은 과일과 꽃조각으로 둘러싸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레체의 성당들이 다른 곳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일 조각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성당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입문을 지키는 가드에게 언제쯤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날 저녁 9시까지 대관을 했단다.
아쉽지만 산 마테오 성당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보리색 리본으로 장식을 한 웨딩카 '방금 결혼했어요' 라며 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떡 하니 놓여있었다.
그곳 역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
이탈리아도 결혼식의 길일이 있나?
성당 통합 티켓 다섯 군데에서 가장 큰 두 곳을 못 들어갔다.
'티켓을 판매할 때 예식이 있어 입장이 불가한 곳이 있음을 미리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화가 좀 났다.
레체는 종이공예가 유명하여 거리에 종이 공예 가게들이 많이 보였다.
어떤 건 디테일이 너무 정교하여 가까이 들여다봐도 종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작품도 있었다.
사암을 조각칼로 문질러 작은 기념품을 만드는 청년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성당 파사드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물과 과일, 꽃무늬가 저렇게 하나하나 만들었겠구나 짐작되었다.
중요한 두 성당을 놓치고 나니 맥이 빠지면서 약간 무기력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즈음 하나둘 문을 연 상점들이 내 시선을 빼앗았다.
레체는 제법 큰 도시라 아기자기하고 예쁜 골목은 없지만 고급스러운 상점이 제법 많았다.
구경도 하고 모처럼 소소한 쇼핑도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오랜만에 해산물이 먹고 싶어 시푸드 레스토랑을 찾아갔는데 테라스석이 바람 한 점 없는 땡볕이다.
여긴 아니다 싶어 오론초 광장 뒤편의 레스토랑을 찾아가는데 원형 극장이 보였다.
레체에 오래된 원형극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그것은 2세기에 지어진 로마 원형 극장으로 1901년에 인부들이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BB는 햄버거 스테이크를 나는 수제 파스타를 주문했는데 맛이 꽤 훌륭했고 BB도 만족해하셨다.
전날에 이어 모노폴리로 바다 수영을 간 자매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곳 바닷가 근처에 테이크 아웃할 수 있는 깔라마리 음식점이 있으니 맥주랑 간식으로 먹으라는 내용이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어제 모노폴리가 너무 좋아서 수영을 많이 했더니 피곤했는지 우리 셋 다 알람소리도 못 듣고 늦잠을 잤어.
그래서 오늘 모노폴리에 못 가고 쉬고 있는 중이야.'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내일은 오스투니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우리는 오늘 못 갔으니 내일도 모노폴리로 가고 싶은데...'
'오케이. 그럼 너희들은 모노폴리 기차표 예매할게. 편히 쉬어.'
사실상 풀리아에 와서 알베로벨로와 폴리냐노 아 마레만 함께 하고 시간이 다 가버려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취향대로 여행을 즐기는 자매들과, 모르는 곳을 찾아다니며 하나씩 알아가는 정적인 시간을 좋아하는 나, 그렇게 따로 또 같이 하는 여행도 나쁘지 않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구멍이 숭숭 난 고목으로 만든 피아노와 더블 베이스가 보여 발걸음을 멈췄다.
바깥의 햇빛이 너무 강해서 실내가 어두워 잘은 안 보이지만 인테리어가 독특했다.
바깥의 명패를 보니 그곳은 1508년에 지어진 페로니 궁전(palazzo dei perroni)으로 지금은 폴리카스트로라는 이름의 부티크호텔이었다.
레체의 골목을 거닐다 보면 어떤 건물의 벽 모서리에 조각된 여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사랑 이야기가 있다.
한 건물에는 청년이, 맞은편 건물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살았다.
두 사람은 몰래 창가에 서서 상대방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따로 만나거나 대화를 한 적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랑은 플라토닉 하고 영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된 소녀의 부모는 청년과의 관계를 차단하기 위해 창문을 아예 막아버렸다.
그녀는 장벽을 제거해 달라고 열렬히 간청했지만 아버지는 완고했고 어머니 역시 소용이 없었다.
견디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 소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년은 매일매일 그녀가 나타나길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건물 벽에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녀의 얼굴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발코니 모퉁이에 남아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IMF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이탈리아의 GDP는 세계 9위, 1인당 GDP도 39,580달러(26위)로 대한민국(34,165달러, 31위), 스페인(34,045달러, 32위), 일본(33,138달러, 34위) 보다 높다.(2024년 7월 24일 기준)
일본의 경기가 안 좋다는 얘기는 수년 전부터 들었지만 우리의 GDP가 앞섰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같이 3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반도국가로 바다 자원이 풍부하다.
북쪽으로는 돌로미티라는 알프스, 수상도시 베네치아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관광 자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지역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어 모두 다른 개성과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지중해성 기후를 갖고 있어 포도, 올리브 등을 생산하기 좋아 세계 최고의 와인, 올리브유 치즈 등을 생산한다.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고 뛰어난 손재주로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건축, 회화, 조각, 거기다 음악까지 뭐 하나 빠진 게 없이 다 가졌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인들이 존재하는 이곳에는 구찌, 프라다, 미우미우, 펜디, 돌체 앤 가바나, 발렌티노, 베르사체, 막스마라, 보테가 베네타, 살바토레 페라가모, 아르마니, 로로피아나 등 수 없이 많은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피자와 파스타를 비롯한 음식 또한 최고의 맛을 갖고 있다.
국민들은 다정다감하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갖고 있으며 뛰어난 예술성을 갖고 있다.
게다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서두르지 않는 여유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이쯤 되면 이탈리아는 가히 다 가진 복 받은 나라이다.
하지만 다 가진 나라의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는 나도 그만하면 괜찮지 싶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 내일의 오스투니도 후회 없이 덮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