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크레마(에필로그)
책은 마음을 채웁니다.
사진은 기억을 다듬어요.
글은 나의 시선을 세상에 풀어놓습니다.
음악은 흐르던 감정을 정리해 주고,
영화는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줍니다.
이탈리아 영화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1971년 8월 10일 ~ )의 영화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햇살에 눈이 부시듯,
지나간 여름의 냄새가 불쑥 떠오르듯.
그의 세계에 처음 들어선 건, 2009년 《아이 엠 러브》.
틸다 스윈턴의 눈빛이 말보다 많은 걸 건넸고, 존 애덤스의 음악은 그 장면들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지요.
금기의 껍질을 깨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회복해 가는 이야기.
마치 눈을 감고 익숙한 길을 다시 걷는 듯한, 두려움과 해방의 이중주.
그리고 두 번째 여름.
《Call Me by Your Name》.
사랑이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답고,
때론 잔인하고, 허무하게 스러지는지를.
햇살과 나뭇잎과 물소리로 속삭이던 영화.
그 이름을 부르며 너를 불렀고, 그 여름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종소리처럼 울립니다.
그래서 찾아갔습니다.
그 여름의 배경이 된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크레마(Crema).
도시 입구에 다다르기 전, 붉은 벽돌의 기이한 성당 하나가 시야를 가득 채웠습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바실리카 산타 마리아 델라 크로체.
아치가 돌고, 청동빛 돔이 얹힌 건물은 중세의 시간이 그대로 머물고 있는 듯했지요.
잠시 발을 멈추고, 바람과 빛을 천천히 눈에 담았습니다.
무솔리니 동상이 서 있는 광장을 지나 작은 교회들과 좁은 골목들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던 두오모 광장이 보입니다.
13세기에 지어진 성당은 건장한 청년처럼 든든한 모습으로 광장에 서 있었지요.
회랑 아래 작은 관광 안내소에 익숙한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엘리오의 피아노 악보, 자전거를 탄 스틸컷, 그리고 벤치에 앉은 그들의 여름이 엽서가 되어 쌓여있었지요.
지도를 받아 들고, 그들이 걸었을 법한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낙서로 뒤덮인 철문 앞에서 발을 멈췄습니다.
수없이 쌓인 이름, 날짜, 사랑의 고백,
이해되지 않는 상징들까지.
누군가의 마음이, 누군가의 계절이
그 철문에 아직도 매달려 있었습니다.
“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
그 말은,
서로를 완전히 알지 못해도 부드럽게 문을 여는 행위.
불확실한 마음과, 떠나야 하는 예감을 품은 애틋함이죠.
나는 그 철문에 손끝을 대고, 그 침묵의 무게를 천천히 더듬었습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골목,
영화 속 자전거를 닮은 자전거들이 부드럽게 곁을 지나갑니다.
바퀴소리도, 바람도, 모두 영화 속 음악처럼 들렸어요.
광장 한편 카페에 앉아 차를 마셨습니다.
그늘진 분수, 멈춘 듯한 시간,
유리창에 스친 내 실루엣이 오래된 영화의 필름처럼 낡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여행의 마지막은 요란하지 않아도 됩니다.
멋진 풍경 하나 남기겠다는 강박 없이,
그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마주하는 오후, 그거면 충분했지요.
다시 차에 탔습니다.
영화 속 그 집, 여름 내내 두 사람이 머물렀던 곳, 빌라 알베르고니(Villa Albergoni)를 찾아갔지요.
그러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름다운 집의 모습은 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여름이,
그 사랑이,
그 집 어딘가에 아직 머물고 있다는 걸.
이별 앞의 고요,
남겨진 사람의 눈빛,
멀어지는 기차 안의 침묵.
그 모든 감정이 크레마라는 도시 안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말펜사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정체로 이어졌어요.
설상가상 스마트폰은 과열되어 지도를 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Error, Emergency call”이라는 경고 메시지까지 나타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지요.
하지만 예상 밖의 흐름, 고장, 지연까지도 여행의 일부입니다.
나쁜 추억은 있어도 나쁜 경험은 없으니까요.
다행히 주행하는 데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 메시지라 무사히 공항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풍경 배달’, ‘사진 배달’, ‘마음 배달’이라는 이름으로 기억을 나눈 시간들이 흐뭇했습니다.
"그리스에서 돌로미티까지, 기억의 지도."
마침표를 찍습니다.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