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콜 라이저, 레씨에사
돌로미티에는 슈퍼 스타도 있지만 조연급, 엑스트라급도 있답니다.
물론 트래킹을 즐기는 하절기, 스키를 즐기는 동절기의 인기 코스는 달라지지만요.
오늘은 조연급 곤돌라를 타러 갑니다.
1. 셀바 디 발 가르데나(Selva di Val Gardena) - 치암피노이(Ciampinoi)
치암피노이 곤돌라는 그날 운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돌로미티는 넓고, 갈 곳은 많으니까요.
사진작가들이 찍은 풍경 사진이 도로변에 걸려있었습니다.
그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수고로움을 압니다.
해가 뜨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컴컴한 산을 올랐을 테고
수없이 많은 셔터를 눌렀을 겁니다.
프로들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은 다르더군요.
마을을 한 바퀴 걸었습니다.
겨우 해발 1500m인데 힘이 들었지요.
커피를 마셨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은 오직 나 혼자입니다.
곤돌라를 탔더라면 그곳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커피 브레이크, 쌉쌀한 행복입니다.
갑자기 마을의 고요함을 쪼개놓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포르셰 박스터, 오펠 스피드스터, BMW Z4, 로터스 엘리스 등 각종 스포츠카들이 줄지어 달려왔지요.
반짝이는 차체가 햇살을 튕기며 나아가는 그 풍경이 낯설었습니다.
꼬불꼬불한 산길의 아찔한 질주를 상상하니 벌써부터 멀미가 느껴집니다.
산을 즐기는 방법도 참 다양합니다.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오토바이 타는 사람, 스포츠카를 타는 사람.
저마다 속도는 모두 다르지만 만족도는 어떻게 다를까 싶습니다.
2. 산타 크리스티나 (Santa Cristina) - 콜 라이저 (Col Raiser)
산타 크리스티나 마을에 있는 곤돌라 콜 라이저를 타러 갔습니다.
그 선택은 조용한 기쁨이 되었지요.
길은 예상보다 부드럽고 조용했습니다.
이름도 모를 꽃들이 발끝에서부터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해발 2천 미터의 바람과 어둠의 적막을 견뎌낸 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맑고 환함만 가득했지요.
그 작은 풀꽃들이 나보다 낫구나 싶습니다.
혼자 산길을 걷다 보니 생각도 가벼워집니다.
한참을 걷고 나서 바위에 걸터앉았습니다.
구름은 많지 않았고 바람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물 한 모금, 숨 한 번.
마음이 조금씩 내려앉습니다.
돌아가는 길, 조금 더 천천히 걸었습니다.
산은 크고, 나는 아주 작았습니다.
3. 오르티세이 (Ortisei) - 레씨에사 (Resciesa)
레씨에사에서는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갑니다.
곤돌라와 달리 15분에 한 번 운행하는데 경사가 꽤 가팔랐지요.
나 말고 2명, 그러니까 총 3명이 탔습니다.
아마도 비 인기 지역인가 봅니다.
남녀 커플이 가운데로 타기에 나는 혼자 맨 앞 열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저 멀리 숲에서 어린 사슴이 폴짝 뛰어나왔습니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다시 숲으로 들어갔지요.
아쉽지만 신기했던 찰나입니다.
레씨에사는 그야말로 돌길.
웅장한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습니다.
함께 온 두 남녀는 망설임 없이 방향을 찾아 떠났지만 나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도 돌을 골라 밟으며 따라가 봅니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여인이 혼자 산을 내려옵니다.
어딘가 쓸쓸해 보였지요.
타인이 나를 볼 때도 저런 느낌일까?
아무렴 어떻습니까?
쓸쓸함도 존재의 이유인걸요.
산에 들었다 나오는 일은,
항상 그렇듯 조금의 침묵을 안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더 담고 싶지만 적당히 멈춰야 합니다.
사는 것이 그런 것처럼요.
욕심은 내려놓고, 감탄도 가라앉힌 채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이곳과의 작별.
돌아가야겠습니다.
아쉽지만, 마음은 가볍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아까 그 사슴을 또 보았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사슴임에 분명합니다.
아니면 사춘기에 들었거나요.
오르티세이는 알록달록한 색상 목조 주택들이 마치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풍경을 자아냅니다.
돌로미티 산맥의 웅장한 봉우리들과 푸른 초원, 그리고 그림 같은 마을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젤라또 하나 손에 들고 걸어가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4. 파쏘 가르데나 (Passo Gardena)
파쏘(passo)는 이탈리아어로 '고개', 고갯길을 의미하며 주로 도로가 지나가는 지형을 뜻합니다.
사쏘(sasso)는 '바위', 암벽이라는 뜻으로 산이나 바위 봉우리를 지칭할 때 사용하지요.
파쏘 가르데나(북쪽), 파쏘 셀라(서쪽), 파쏘 캄포 롱고(동쪽), 파쏘 포르도이(남쪽) 등은 돌로미티에서도 유명한 고갯길입니다.
이동하다 자연스럽게 지나기도 하지만 일부러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하지요.
오후 4시,
파쏘 가르데나로 향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었지요.
구부러진 도로를 미끄러지듯 회전하는데 도로변에 여우 한 마리가 서 있습니다.
탐스럽고 풍성한 꼬리털이 분명 여우 맞습니다.
캐나다 로키에서는 간간히 곰과 엘크, 산양 무리들을 만났지만 여우는 처음입니다.
그곳이 얼마나 깊은 산중인지 실감이 났습니다.
굽이 굽이 회전을 하면서도 시선은 드문드문 서있는 집들로 향합니다.
옆자리에서, 그리고 뒷 좌석에서 감탄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본다는 게 무척 아깝습니다.
아니 안타까웠지요.
길은 그대로 날 것의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의 작은 터전들이 모두 엽서 조각을 이어놓은 것 같습니다.
가르데나 고개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미국 텍사스 지방의 황야에서 볼법한 낡은 건물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있습니다.
두세 명이 언덕에서 내려올 뿐 오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위산의 틈새에 남아있는 하얀 눈.
계절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남루해 보입니다.
초록풀과 노란 꽃들의 화사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5. 밀카
'안녕~ 실비아, 오늘 여행은 어땠어요?'
'안녕~ 밀카, 오늘도 멋진 하루였지요, 인스브루크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어요.
그리고 이건 지역관광세예요.'
나는 그녀에게 30유로를 내밀었습니다.
인스브루크에 있을 때 호스트인 데이비드의 연락을 받았죠.
1인당 하루 3.9유로, 그러므로 총 27.30유로의 지역관광세를 내야 한다고요.
'아니에요, 실비~. 그거 안 내도 돼요.'
'하지만 데이비드가 나한테....'
'알아요.
데이비드는 내 아들이고 나는 이 호텔의 오너예요.
그러니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어요. 실비아, 당신은 그 지역관광세, 안 내도 돼요.'
그녀가 특별히 나한테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감사의 말을 하려는데 밀카가 거듭 말했습니다.
'내일 떠나죠? 선물이 있어요. 혹시 초콜릿 좋아해요?'
밀카는 정성스럽게 리본을 묶은 초콜릿을 건넸습니다.
웰컴 선물은 받아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사실 그곳의 호스트에게 줄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이미 주었거든요.
매일 내 방을 청소해 주고 정리해 주는 객실 메이드 '아니타'에게요.
다행히 가방 속에 전통 누비 지갑이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혹시 여행 중에 도움을 받게 되면 선물할 요량으로 지니고 다녔던 것이었습니다.
'밀카, 사실은 나도 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노란색 누비 지갑을 받아 든 밀카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왠지 외로워 보였지요.
늘 진한 화장에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 이유가 외로움을 들키지 않으려는 포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동안 밀카와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내일은 돌로미티를 떠납니다.
여행은 아쉬움이 남아야 성공입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크레마(Crema)에 들를 참입니다.
'Call me by your name'의 두 사람,
<엘리오와 올리버, 올리버와 엘리오>의 흔적을 따라가 보려고요.